[강윤미의 사는 이야기] (1)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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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미의 사는 이야기] (1)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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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를 보내고 지친 어느 날....

▲ 강윤미 님



지천으로 널린 쨍한 햇살에 눈동자가 저절로 오므라지는 하늘을 멍해져서 바라보다가 불쑥 지겹던 장마의 비 냄새가 큼큼하게 젖어 발효되지 못한 생 곰팡내에 방구석에 밀려나 있는 이불이 생각난다.

"... 빨아야지..."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의 창문을 온 몸으로 밀어 열고 돌아와 내 맘대로 접어지지 않고 자꾸만 미끄러져 내리는 얇은 홑이불을 몇 분이나 끌어안고 싸움질을 해 겨우 가슴 안에 담고 또 한참동안 두 손 모아 깍지를 껴 이불을 들기 위해 내 손과 실랑이를 벌이고 헉헉거리며 기껏, 서너 발자국만 이불을 옮기면 될 것을 끌어안고 그 서너 발을 위해 나는 마치 투우사가 성난 소를 부리는 것처럼 이불을 안고 싸운 끝에 겨우 가슴 안에 들어 안았다.

이젠 세탁기 앞까지 걸어가 담기만 하면 된다.
한쪽 무릎을 침대에 붙이고 둥실거리는 두 팔 안의 이불덩어리를 안고 침대 끝에 두발로 서기까지 족히 10분은 넘게 결렸다.
한숨을 쉴 틈도 없이 이불을 끌어안은 두 팔이 경련을 일으키기 전에 뒤뚱거리는 오리걸음으로 세탁기를 향해 간다. 가는 길 중간엔 두 팔을 활짝 펴고 자질구레한 것들을 걸치고 앉은 빨래걸이가 말똥거리며 얄밉게 보고 있다.
최대한 이불을 어디에도 걸려 툭, 제 맘대로 떨어져버리게 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빨래대가 놓인 좁은 통로를 지나본다.

휴우....
다행이다. 유리창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불을 세탁기 앞까지 가지고 가는데 성공이다.
이불을 세탁기에 넣느라 잠깐 끙끙거리며 나지도 않는 힘을 두 손에 실어 이불을 꾹꾹, 눌러 담고 콘센트를 꽂고 세제를 담고 작동스위치를 삑, 소리가 나게 누르고 나자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물이 쏟아져 내린다.

말갛게 쏟아져 내리는 물을 보며 긴 숨을 몰아쉬는 내 입술에 심술이 덕덕 묻어있어 조금만 더 이불과 실갱이를 했다면 욕이 두루루.. 한 사발은 쏟아져 나왔을 거다.
세탁기 뚜껑을 닫고 방에 들어온 몸이 풀썩, 이 아닌 퍽, 소리가 나게 주저앉아진다.

 ..... 쏴아아.....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세탁기의 물소리에 나도 물 한잔이 간절해진다.

이불과 단오 날 황소씨름 하듯 이불이란 녀석과 버둥대며 한바탕 소란을 끓였더니 온 몸에 열이 화르륵 올라 입술 끝이 퍽퍽해진 채, 앉아 나는 멍하게 몇 발작 사이를 두고 무뚝뚝한 바위처럼 서있는 냉장고를 바라보며 하아, 하아, 안타까운 숨만 헉헉댄다.

“하아.... 에이, 씨.... 앉지 말고 먼저 물 마실 걸.....”
만근처럼 느껴지는 몸을 또 일으켜야 하는 게 끔찍해져서 입술만 핥다 만다.

힘들다.
사는 건....

기껏, 여름 홑이불 하나를 빨기 위해 몇 십 분을 진땀 흘려가며 끙끙거려야 하는 나는 가끔은 사는 게 힘들다.
코끝에 앉은 모기 한 마리를 쫓지 못해 결국엔 장렬하게 헌혈당한 채 가려움과 이 밤을 동거해야 하는 나는 사는 게 가끔은 어이없어 웃게도 된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콧김을 휭휭... 내어놓으며 돌아가는 성능 좋은 우리 집 세탁기에 빨아내보고 싶은 상상을 해보게 되고는 한다.
그러면 내 몸이 잘 빨아진 새 옷처럼 말짱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내 몸을 빵빵 털어내어 볕에 내걸면 말짱해지지 않을까....

그럼, 얇은 이불 하나 빨기 위해 몇 십 분을 황소싸움하지 않아도 될 테고, 코끝에서 알짱거리는 모기에 본때를 보여주기도 할 수 있을 텐데....
목마름에 헐떡거리며 꼼짝 못하고 앉아 가재미처럼 흘겨보는 내 시선에도 끄덕하지 않는 무뚝뚝한 냉장고 녀석을 한 대쯤 쥐어박아 주어도 될 텐데....

하지만,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만근의 무게를 버텨야만 할 때에도....
얇은 이불 한 장 빠느라 황소씨름을 해가며 비지땀이 흘려도...
앵앵거리는 얄미운 모기에게 본때를 보이지 못해 녀석에게 내 금같이 소중한 피를 고스라니 헌혈해주어야 하지만....

그래도 사는 게 가끔은 아직은 살 만하다 여겨질 때가 있다.

아무 이유 없는 삼백 예순 다섯 날.
아무 이유 없이 날이 밝아오는 당연함처럼

아무 이유 없는 삼백 예순 다섯 날.
아무 이유 없이 주는 늙은 부모의 가슴과.....

아무 이유 없는 삼백 예순 다섯 날.
수만 가지의 이유로 살고 있는 나.....

그래서...
세상은 살만 하다....

<강윤미 / 헤드라인제주 객원필진>


* 필자인 강윤미 님은 현재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아랏벌에서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강의실을 오가는, 그러나 항상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강윤미 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의 나이, 이제 마흔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늦깍이로 대학에 입문해 국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분입니다. 여름 홑이불 하나를 빨래하는데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을 해야 하는 사는 이야기처럼, 그는 365일 하루하루를 매우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강윤미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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