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 기자(箕子)조선 퇴출, 알고보니 일제식민사학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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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 기자(箕子)조선 퇴출, 알고보니 일제식민사학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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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역사교과서 고조선·훈민정음, 수정보완하라’(뉴시스 11월20일 송고) 보도 이후 기자조선이 도마 위에 올랐다. 기자(箕子) 조선은 허구라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사실일까.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을 제외시킨 교과서는 이번 국정 역사교과서 뿐 아니다. 기존의 검인정교과서 7종은 물론, 이전 국정 교과서들도 대부분 기자조선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념적 성향을 막론하고 기자조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쪽이 역사학계의 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간교한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라는 반박이다.

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 소장은 “부여에서 고구려를 거쳐 고려, 조선 시대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자를 당연히 우리 조상으로 여기고 제를 올렸고 기자조선을 우리의 조상국으로 여겼다”고 짚었다. 이어 고구려에서 기자대왕에게 제를 올렸다는 원문 기록을 근거의 하나로 제시했다.

①‘삼국사기’ 권32 제사 편: “당서에 이르기를, 고구려 풍속에는…영성(농사를 주관한다는 별 이름)과 태양, 기자 및 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唐書云, 高句麗俗…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②‘구당서’ 고구려전: “고구려의 풍속에는…농사를 주관하는 영성신, 태양신, 가한신, 기자신을 섬긴다.(其俗…事靈星神, 日神, 可汗神, 箕子神)”

③‘신당서’ 고구려전: “고구려의 풍속에는…영성 및 태양, 기자, 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俗…祀靈星及日, 箕子, 可汗等神)”

박 소장은 “지금 사람들은 세종대왕을 우리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라 여기고 세종대왕 탄신일을 스승의날로 삼아 기리고 있다. 그 훌륭하다는 세종대왕이 ‘기자조선’을 ‘단군조선’의 뒤를 이은 조선이라 해 ‘후조선’이라고 했고 ‘기자’는 ‘후조선 시조’라 칭했는데, 그 분이 (역사학자) 이병도나 우리들보다 더 역사에 무지해서 그랬을까”라고 반문했다.

주나라의 영향을 받아 붉은색을 좋아하는 중국과 달리 흰색을 숭상하는 우리 문화는 바로 기자조선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일제식민사학 잔재의 증거를 내놓으려면 ‘백의민족’ 얘기부터 해야한다.

전국시대 사상가 추자(추연)는 “세상의 모든 현상은 ‘토→목→금→화→수’라는 오행상승(오행상극) 원리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창하며 중국 역사 또한 이러한 순환반복의 원리를 따른다고 했다. 즉, 맨 처음 토의 덕으로써 왕이 된 우왕조 순임금의 뒤를 이은 하나라는 ‘목극토(木克土)’에 따라 목의 색인 청색을 숭상했다. 하나라 다음 상나라는 ‘금극목(金克木)’에 따라 금의 컬러인 백색을 숭상했다. 또 은상 후 주나라는 ‘화극금(火克金)’의 원리에 따라 화의 붉은색을 숭상했다.

이런 연유로 “은나라의 백색 풍속을 이어받아 기자조선 또한 백색을 숭상했고, 그 이래 근세까지 우리는 일관되게 ‘백의민족’이었다. 염색 기술이 부족하거나 가난해서 백의를 입은 것이 아니라 전통이 ‘백의문화’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나라가 망할 때 자신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 주나라의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준 은나라의 왕족 기자는 신하가 아닌 스승의 자격으로 조선을 분봉 받았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현대의 캐나다와 뉴질랜드가 비록 영연방이지만 독립 주권 국가들인 것처럼, 기자조선은 독립국의 자격으로 분봉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기자조선과 그 뒤의 부여가 주나라 역법이 아닌 은력(殷曆)을 고수했고, 주나라의 붉은색을 거부하고 은나라의 흰색을 숭상했던 것이 증거다. 박 소장은 “다시 말해 주나라에 복종하는 일반 제후국이었다면 당연히 주나라 역법을 써야 하고, 주나라에 호응해 붉은 색을 숭상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았으니 신하로서 봉함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고대엔 제후국이라도 이처럼 성질이 다른 나라가 있었으니 자존심 상해 할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

은나라 멸망 1000년 뒤에도 부여에서 은력이 사용됐다는 증거는 ‘삼국지’ 권30과 ‘위서(魏書)’ 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以殷正月祭天)”는 기록이다.

【서울=뉴시스】고조선 관련 부분, 국정 역사교과서

박 소장은 “근세 이씨조선(비하칭 아님)도 부여의 뒤를 이은 고구려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기자대왕에게 제를 올린 사실은 더 제시할 필요도 없다. 기자조선이 우리 역사라는 믿음은 근세조선 말기를 거쳐 일제 초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는 1921년 9월21일자 매일신보 ‘조선의 역사적 관찰’이라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고 밝혔다.

“조선역사에는 제일로 은의 주왕을 간하다가 불청(不聽; 들어주지 않음)함으로, 간하던 기자가 조선에 와서 평양에 도읍하얏다. 이것이 조선역사의 시작이라고 오래동안 언론되얏섯다…이외에 조선역사는 기자조선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다수는 信(믿을 신)하얏섯다.”

일제는 집요했다. 고심 끝에 일제는 수천년 동안 단단히 한 몸처럼 결합돼 있는 조선과 중국을 이간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선과 중국을 떼어놓지 않고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라는 사상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을 것이어서 그랬다.

1925년 6월 일제는 우리 민족사를 왜곡하고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조선총독부 부설로 조선사편수회라는 연구기관을 설치한다. 1934년 7월30일 조선사편수회 제8회 위원회가 열린 자리에서 수사관(修史官) 이나바 이와키치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기자는 중국 사람이므로 기자조선사는 조선사에서 제외해야 하고, 중국역사의 일부로 취급해야 한다.”(이상시 ‘겨레의 바른 정사’, 1987)

한 마디로 한국역사에서 기자조선을 빼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역사는 중국과의 끈끈한 시초적 고리가 끊어지게 된다. 1000년 왕국 기자조선이 삭제되면 이전의 단군조선 역시 공중에 붕 뜬 신화로 취급, 무시될 수밖에 없음을 노린 것이다. 이후 일제는 ‘동조동근’(同祖同根;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 같은 뿌리) 설에 입각해 1937년 원활한 조선통치를 위해 내선일체 정책을 본격 펼친다.

박 소장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일제식민사학에 맞장구친 조선인 학자들이 있었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이병도다. 조선사편수회 촉탁(1925~1929)으로도 있었던 그는 기자동래설을 적극 부인함으로써 조선사에서 기자조선 퇴출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식민사학에 동조 앞장섰다.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1976)에서 ‘오늘날 기자의 동래, 동봉설(東封說)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볼 때 소위 낙랑조선민의 법금팔조란 것은 기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조선의 본유본래(本有本來)의 법금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왜곡·허언했다”고 비판했다.

“그 후 지금까지 이병도의 제자들 또한 스승의 뜻(결과적으로 일제식민사학의 방침)을 거역치 못하고, 기자동래설 부인 및 기자조선을 우리 역사에서 삭제하고 나아가 기자조선의 고유한 법령인 8조법금을 단군조선의 법령으로 둔갑시켜왔던 것”이라는 지적이다.

박대종 소장은 “애국 사학자들은 일제식민사학이라면 치를 떨고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정 및 검인정 역사교과서에서 기자조선이 우리 역사에서 퇴출되고 기자조선의 8조법금이 단군조선의 법령으로 둔갑한 기록의 시발점이 일제식민사학임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역사는 사실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기록해야지, 일제의 수작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 덫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상적 측면에서 아직도 일제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데 이 얼마나 우매한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뉴시스>

한편, 기자조선과 중국의 동북공정은 별개 사안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빌미로 딴소리를 하면, 역공하면 그만이다. 예컨대, 한자의 기원인 갑골문자의 왕국 은나라가 우리의 직계 조상국이니 중국은 한국의 문화 종속국인가라는 식이다. 중국은 적색을 숭상하는 주나라처럼 지금도 빨간색 투성이인데, 백색을 숭상하는 은나라가 더 먼저이니 문화적으로 적장자는 백의민족인 한국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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