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유족회 대만 방문단, 대만 2.28과 역사적 첫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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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유족회 대만 방문단, 대만 2.28과 역사적 첫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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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양윤경)는 15일부터 17일까지 유족회 임원과 각 지역 지부장, 배·보상특별위원회 위원을 비롯해 양조훈 전 제주도 환경부지사, 고창훈 제주대학교 교수 등 39명이 참여한 가운데 대만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유족회는 2·28국가기념관(관장 양전뤙)을 비롯해 2·28기념공원 등을 찾아가 화해와 상생을 위한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특히 양전뤙 2·28국가기념관장과 2·28연구보고서 총주필을 맡은 대만국립중앙대 제항라이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제교류 좌담회를 개최해 대만 2·28을 재조명하고, 4·3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봤다.

이번 방문에선 2·28사건의 진상 규명과 상처 치유, 배상 과정을 제주4․3과 비교하면서 아직도 한국 정부가 외면하고 있는 배·보상 문제와 새 정부가 들어선 대만의 재규명 작업 등을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

지난 15일 2·28국가기념관(관장 양전뤙)에서 개최한 국제교류 좌담회는 양조훈 전 제주도 정무부지사가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좌담회에서 대만국립중앙대 제항라이 석좌교수는 “진상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군사 파일을 열람했고, 중국, 미국, 영국, 일본 등을 방문해 자료를 발굴했다”며 “1992년 2·28연구보고서를 발표하자 뉴욕타임스와 영국BBC에서 보도를 하는 등 진상 보고서를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 말했다.

양전뤙 2·28국가기념관장은 “처음에는 보상으로 진행했으나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면서 12년 만의 노력 끝에 배상으로 바뀌게 됐다”며 “그러나 40년이 지나서 배상업무를 시작해 유족들은 증거 제출에 어려움을 겪었고, 배상업무는 굉장히 힘들었다”고 말했다.

양 관장은 또 배상 신청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5년마다 배상업무가 실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앞으로 4·3유족회에도 닥칠 배상문제에 대해선 지혜롭게 풀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좌담회에서 양윤경 유족회장은 “유족회의 대만 방문을 통해 이웃나라끼리 아픔을 공유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며 “제주4·3보다 앞서가고 있는 대만 2·28을 공부하면서 4·3영령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헤드라인제주>

* 대만 2.28사건은?

▷2·28사건의 배경과 발단=대만은 1945년 50년 동안의 일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다. 당시 대만 인구 비율은 본성인 주류를 이뤘고 외성인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참고로 본성인(本省人)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절 대만에 터전을 잡은 초기 이주자이며, 외성인(外省人)은 광복을 맞이한 후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외성인은 인구 비율이 적었지만 국민당 정권 아래 고위 관리직을 독차지하는 등 기득권 세력을 이뤘다. 이로 인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계층 간 갈등과 대립을 겪게 됐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에서 정부 전매품인 담배를 허가 없이 노상에서 팔던 린쟝마이라는 노파가 전매청 단속반원에 의해 무차별 구타를 당한 데서 시작됐다.

시민들이 과격한 단속에 항의는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한 총에 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다음 날인 2월 28일 분노한 군중들은 봉기해 경찰서에 난입한 데 이어 행정장관청을 항의 방문했다. 그러나 기관총으로 총살을 당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해 대만 전역에서 항쟁이 벌어졌다.

▷국민당군의 진압과 학살=천이 행정장관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는 민중 궐기에 대해 장제스(장개석) 총통에게는 정부 전복 시도라고 보고하고, 증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1947년 3월 국공내전에도 장제스는 2개 사단 병력을 파견했다. 국민당군은 본성인에 대해 무차별 학살과 약탈을 자행해 섬 전체는 초토화됐다. 더구나 사건처리위원회 구성원으로 활동했던 엘리트들도 처형했다.

▷사건은 40년 동안 금기되다=1949년 대만 전역에 내려진 계엄령은 1987년까지 38년간 이어졌다. 사건 발생일로 보면 40년 동안 2·28사건은 금기시 됐다.

계엄령 해제 후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다. 대만 출신인 리덩후이 총통은 1995년 국가 차원에서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를 했다.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 정부는 공식적인 사죄와 더불어 타이베이에 2·28기념공원을 조성했다.

1992년 발표한 2·28사건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 수는 1만8000~2만8000명으로 추산했다.

앞서 대만은 1995년 이미 배·보상 조례를 제정했다. 사망·실종자는 평균 2억원을 지급했으며, 구금을 당한 사람에 대해선 형량에 따라 최고 1억7000만원에서 최저 2000만원이 지급됐다.

대만 정부는 지금까지 희생자 1만4명에게 총 2530억원을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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