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폭력적 진압 대비 '화염병' 제조...그러나 '자제...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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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폭력적 진압 대비 '화염병' 제조...그러나 '자제...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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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13] 6월 평화시위 중 대량 발견된 '화염병'

1987년 6월, 제주에서 대규모 평화적 시위가 고조되고 있을 즈음, 경찰은 뜻밖의 발표를 했다. 일명 '꽃병'으로 불리우는 화염병 등 각종 시위용품이 도심지 주택가에서 대량으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당시 제주경찰서는 6월24일 밤 9시부터 자정까지 시민제보에 따라 제주시 중앙로터리와 남문로터리 사이의 대형 건물 주변 등을 수색해 화염병 140개를 비롯해 솜방망이 3개, 각목 7개, 시위용품을 담은 가방 11개를 발견, 모두 수거했다고 발표했다.

제주신문도 '시위용품 대량 발견'이란 제목으로 이 부분을 크게 보도했다(1987년 6월24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들 시위용품들은 특히 으슥한 곳에 풀이나 베니어 등으로 감춰져 있었는데 경찰당국은 이들 시위용품이 휘발유.신나 등 인화성이 강해 화재위험이 많다고 보고 옥상이나 비상계단 등 집주변을 잘 살펴 이들 시위용품이 발견되면 즉각 신고해줄 것을 시민들에게 당부했다.

▲ <제주신문 1987년 6월25일자>
시위용품 대량 발견
제주시 중심가서 화염병 1백40개 등...신고당부

제주시 중심가에서 화염병.솜방망이 등 각종 시위용품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제주경찰서에 따르면 24일 하오 9시부터 자정께 사이에 시민신고에 따라 제주시 중앙로터리와 남문로터리 사이의 대형 건물 주변 등에서 화염병 1백40개를 비롯, 솜방망이 3개, 각목 7개, 시위용품을 담은 가방 11개를 발견, 모두 수거했다는 것.
이들 시위용품들은 특히 으슥한 곳에 풀이나 베니어 등으로 감춰져 있었는데 경찰당국은 이들 시위용품이 휘발유.신나 등 인화성이 강해 화재위험이 많다고 보고 옥상이나 비상계단 등 집주변을 잘 살펴 이들 시위용품이 발견되면 즉각 신고해줄 것을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제주신문 1987년 6월25일자>

6월21일부터 시작된 대규모 가두시위가 대체적으로 평화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점을 미뤄볼 때 화염병이 대량으로 만들어져 도심지에 숨겨져 있었다는 발표는 뜻밖이었다. 물론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평화적으로 집회를 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한 6월23일 밤의 경우 돌맹이와 함께 화염병이 일부 투척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6월23일 밤 동문로터리 일대에서 일부 투척된 화염병의 경우 지도부의 공식적인 '오더'에 따라 투척된 것은 아니었다. 경찰의 과잉진압에 흥분한 시위대가 페퍼포그와 차량을 뒤엎고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돌발적으로 터져나온 것이었다. 통제불능 일보까지 갔던 그날 극렬한 시위는 나중에 지도부들이 나타나 '자제'를 호소하면서 진정이 되었고 다시 평화적 시위가 이어졌다.

86학번의 한 인사의 얘기다.
"6월23일 밤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폭력적인 진압을 시작하자, 평화로운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순간적으로 크게 흥분한다. 중앙로 현대약국 앞에서 일단 후퇴한 학생들은 관덕정 방면과 동문로터리 두 곳에서 다시 집결하는데, 그 중 동문로터리 시위가 격렬하게 이뤄진다. 가뜩이나 최루탄 발사로 화가 나 있던 터에 이번에는 페퍼포그까지 동원해 쏘려고 하자 한 시민이 그 발사대를 막아선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해 시민들이 갑자기 1000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이에 힘을 얻어 페퍼포그를 뒤엎어버리고 주변에 있던 공사용 지프차를 밀쳐 버렸다. 또 일부는 드럼통을 굴리며 경찰을 위협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화염병도 일부 등장했다."

평화롭게 이뤄지던 시위가 일순간 격렬한 시위로 변모하자, 관덕정 방면에서 집회를 갖고 있던 지도부들은 급히 동문로터리 방면의 시위대를 합세하게 하고 설득에 나선다. 박희수 직전 제주대 총학생회장이 '평화시위'를 호소했고,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으로 고창후와 함께 구속됐다가 1987년 5월 출소한 황인호도 차량 위에 올라가 '비폭력 평화시위'를 하자고 자제를 호소했다. 이러한 설득 때문인지, 제주 6월항쟁에서 화염병 시위는 공식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경찰이 발견했다는 '대량의 화염병'은 운동권진영에서 만일의 사태,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계속될 경우 사용될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끝까지 '자제'를 호소하고 평화적 시위로 전환시키면서 화염병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제주시내 거리에서 화염병 시위가 본격화된 것은 6월항쟁이 끝난 후, 한 여대생이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중태에 빠진 사건이 발생한 1987년 7월부터로 전해진다. 그것도 단 하루 뿐이었다.

사실 제주대에서 1985년 이후 교문 앞 투쟁이 빈번하게 이뤄져 왔지만, 보도블럭을 깨어 투석전을 벌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제주에서는 1987년 6월까지만 하더라도 화염병을 투척하는 시위는 그다지 없었다.

#총장실 점거농성 때 등장한 '콜라병 화염병'

화염병의 첫 등장은 1986년 11월17일 총장실 점거사태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제주대 한라산교지 '붉은 스웨터를 잡아라').

총학생회장 후보였던 현길호와 선거참모 정원태가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경찰에 전격 연행되자 격분한 학생들이 총장실을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이에 경찰이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총장실 앞까지 밀고 들어와 총장실 점거자를 연행하기 위한 진압작전을 개시하자 농성자들은 이것 저것 창밖으로 집어던졌다.

총장실 밖 광장에서는 경찰과 학생들이 최루탄과 돌맹이로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점거농성이 이뤄지던 총장실에서 갑자기 불꽃을 담은 병 한개가 던져졌다. 이것을 본 광장 앞 시위대에서는 '와!'하는 소리가 터져나왔고, 시위 학생들은 손에 돌맹이를 쥔채 그 병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콜라병으로 만든 화염병은 터지지도 못하고 또르르 구르다 말았다. '불발탄'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화염병' 등장이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도 누가 만들었는지, 제대로 된 제조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운동권 학생들조차 당시에는 화염병을 구경할 수 없었기에 이 장면은 내내 기억에 남아 후일담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당시 학교당국으로부터 총장실 점거주도자로 찍혀 '제명처분'을 받았던 모 인사는 이렇게 회상한다.
"생각외로 경찰이 빨리 학내로 진입해 들어오고, 곧바로 총장실 안으로 들어올 분위기여서 농성장안은 다급해졌다. 이것저것 창밖으로 집어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물론 나중에는 경찰이 진입하기 전에 총장실 내부 '비밀문'으로 모두 빠져나왔지만. 그 때 기억으로는 총장실 내부에 석유통이 있었다. 그 통안의 석유를 이용해 이것저것 불을 붙여 창밖으로 내던졌는데, 그 때 하나가 병을 이용해 화염병 모양을 만들어 투척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86년 12월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

최초의 '콜라병 화염병' 등장에 이어 두번째 화염병 등장은 1987년 12월1일 오전 9시30분. 당시 제주시청 정문 앞쪽에 위치해 있던 민정당사에 화염병이 투척됐다. 총장실 점거사태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의 당선을 가로막기 위해 무더기 제명처분을 당한 학생들이 민정당사 앞에서 화염병을 잇따라 투척하고 '우리는 왜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던져야만 했는가'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창후와 황인호 두 학생은 구속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구류처분을 받는다.

이 때 만들어진 화염병은 최초의 화염병 보다는 성능(?)은 다소 개선되었으나 미흡하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한두개는 유리창을 깨며 당사안으로 투척이 되었으나 폭발력은 거의 없었고, 나머지는 벽면에 부딪혀 깨지면서 일부 그을리는 위력만 있었다.

#제조법 종이에 그리며 전수받아...학생회관 옥상서 연습하기도

이러한 두번의 경험을 가진 제주대 학생운동권은 1987년 6월들어 본격적인 '제조연습'에 들어간다. 화염병 제조와 관련해서는 당시 천주교 제주교구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을 맡아 활동했던 박성룡씨(현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가 주축이 되어 '연구'가 이뤄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성룡씨의 얘기다. "도심지에서의 가두투쟁은 사실 경찰에 모두 붙잡혀 갈 것을 각오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비폭력 평화시위를 한다는 것이 원칙이지만, 상황이 어떻게 악화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어요. 최소한 우리를 보호할 수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화염병이 필요했는데, 꽃병을 제작하는 방법에 대해 책에 나온 것도 아니어서.... 그래서 내가 서울대에 다니는 후배를 사인자 서점(당시 운동권진영 학생들을 상대로 사회과학서적을 판매하던 서점)에서 만나서 배우게 됐죠. 백지에 그림을 그리면서 배웠어요. 병 종류에 있어 콜라병과 소주병, 사이다병을 사용했을 때의 차이점, 그리고 신나와 휘발유의 배합비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솜과 광목천을 진공상태로 병과 연결시키는 방법 등을 전수받은 거죠."

박성룡의 얘기처럼 화염병 제조법에 대해 어렴풋이 배운 학생운동권 진영은 6월 대규모 가두시위가 있기 전 제주대 학생회관 옥상과 제주대 인근 내천가에 모여 이를 직접 제조하고 투척하는 실험을 해 보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화염병 제조법에 대해 학생회관 옥상에서 총학생회 몇몇 간부와 함께 연습도 해봤어요. 그런 다음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미리 화염병을 만들어 뒀는데, 한 학생이 첫날 가두시위 때 갖고 내려오다 제주여고 입구에서 검문에 걸려 압수를 당했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언론에서도 일부 보도됐다. 제주일보는 1987년 6월22일자 '제대생 5백명 가두시위' 제목의 기사에서 "이날 가두시위가 벌어지자 도심지 일부 상가에서는 셔터를 내리는 모습도 보였는데, 경찰은 한 학생이 화염병을 소지한 것을 사전에 적발, 회수하고 이 학생을 지도교수에게 인도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제주대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일했던 김성대씨의 얘기다.
"모두 시내로 내려가 시위를 하자는 결의를 했을 때는 경찰의 대응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화염병 준비를 했었던 것이 사실이예요. 총학생회 차원에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최소한 우리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준비해 두었구요. 하지만 가두시위는 비폭력 평화시위가 원칙이었기 때문에 이를 개인적으로 투척하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소주병 구하지 못해 소주 사다가 마신 후 제작 '애피소드'

6월24일 경찰에 의해 적발된 화염병은 총학생회 차원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학습소그룹인 '언더'진영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86학번인 모 인사는 오영덕 감독의 6월항쟁 다큐멘터리 '6월나무'에서 이와 관련한 애피소드를 소개했다.
"한 자취방에 모여 화염병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신나하고 휘발유를 준비하고, 철사 등도 철물점 한 곳에서 사면 의심받을 것 같으니까 여러곳에 분산해서 구입했다. 그런데 소주병이 없으니까, 소주를 사다가 그것을 다 마시고 나서 그 빈병으로 만들기도 했다. 당시(6월22일 전후 예상) 5명이 모여 앉아서 300개정도 만들었다. 다들 신나에 취해서 해롱해롱 해졌고, 그 상태에서 시내 중심가에 숨겨두고 나왔다. 하지만 그날 시위는 평화시위로 전개되면서 그 화염병은 하나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이틀 있다가 가보니까 없어져 버렸다. 집주인이 아마도 신고해 버린 것 같다."

경찰에 적발된 숨겨진 화염병의 출처는 바로 이 부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제주시내 중심가에서 벌어진 화염병 시위, <제주신문 보도사진,1987년 7월13일자>

한편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초보수준'의 화염병은 그해 7월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맞춰 이뤄진 추모집회에서 한 여대생이 경찰이 던진 돌맹이에 맞아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시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사건 때 역시 화염병 시위는 일시적으로 있었을 뿐, 1988년 삼담파출소 화염병 투척 사건, 그리고 1989년부터 화염병 시위가 본격화된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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