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포그 발사대 막아선 '시민의 힘' 최루탄 난사에 격렬한 투석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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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포그 발사대 막아선 '시민의 힘' 최루탄 난사에 격렬한 투석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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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12] 경찰 '강경진압' 돌변과 '극렬시위'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보고자 합니다. <헤드라인제주>

▲ <6월항쟁 20주년 제주사업추진위원회 DB>
[12] 경찰 '강경진압'과 '극렬시위'

1987년 6월21일 '양동작전'으로 첫 대규모 가두시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제주대 학생운동권 지도부는 22일에도 대규모 가두시위를 위해 시내로 집결한다.

그러나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는, 경찰의 과잉진압작전으로 한순간에 전쟁터를 방불케하고 말았다. 시위진압을 위해 제주를 떠났던 전경들이 다시 복귀하면서 6월23일부터 경찰의 대응은 이전과 사뭇 다른 폭력적 진압형태로 변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이미 크게 번지고 있었다.

시민들이 경찰력에 항거하고, 끝내 경찰력을 물리치는 '시민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가 바로 6월23일 시위다. 그동안 먼 발치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던 시민들이 이제는 적극적인 자세로 시위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6월21일 첫 대규모 가두시위를 마친 학생들은 학내로 돌아왔다. 사상 첫 가두시위, 그것도 시민들과 함께 경찰력을 물리치고 일궈낸 싸움이었다는 점에서 저마다 높게 평가하며 승리감에 도취돼 있었다.

월요일인 6월22일부터 기말시험이 시작되기 때문에 학생지도부에서는 이에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물론 6월21일 출정식에 앞서 진행된 비상학생총회에서 박희수 전 총학생회장의 제안으로 기말시험 거부결의가 이뤄졌으나 실제 몇개 학과가 실행할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학생지도부들은 기말시험 거부와 함께 22일 가두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2차 출정식에 학생 2천명 운집...기말시험 전면 거부

드디어 제주 6월항쟁 이틀째인 6월22일 오후 1시. 제주대학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제2차 출정식은 이미 성공을 예감케 했다. 이 곳에 모인 학생은 어림잡아 2000여명(제대신문 보도 숫자). 거의 전 학과에서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제2차 출정식에 참여한 것이다. 사실상 기말시험은 완전 거부됐다고 할 수 있다.

야외음악당에는 학생들이 단과대학별로 깃발을 들고 모이기 시작했는데, 6월21일 '가두시위 성공' 소문이 제주 전역에 나돌면서 농과대학 학생회장 등 비운동권 출신 학생회장들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제주대 교지 <한라산>참조). 이미 대세가 시민 승리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출정식은 오후 1시40분께 끝났다. 출정식을 마친 학생들은 다시 제주대 진입로에 배치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까지 약 8km거리 행진을 시작하여 오후 3시15분경 광양로터리에 도착한다. 이들은 다시 서사로와 중앙로, 동광양로 방면 등 3개진으로 나눠 가두행진을 벌이다 오후 4시30분경 중앙로터리에서 다시 합류한다.

그 때 이곳에 모인 인파는 학생 2천여명 및 시민 1천여명(제대신문 보도 숫자)에 달했다.

86학번 한 인사의 얘기다.
"야외음악당에서 제2차 출정식을 갖고 교문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사이 나를 포함하여 30여명 정도가 제주시내 중앙로로 내려가 가두시위를 벌였다. 30명이 전경과 대치되어 구호를 외치고 있었는데, 경찰은 마이크로 바로 해산할 것을 종용하는 '협박성 위협'을 해왔다. 우리는 인도에 서 있는 시민들을 향해 '시민 여러분, 학생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하고 소리치며 남문로터리 방면으로 후퇴했다. 그때 도로 남쪽방면을 가만히 쳐다보니 수많은 대열이 우리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림잡아 3000명은 되는 것 같았다."

중앙로터리에 집결한 시위대는 그 자리에서 도민시국대토론회를 열었다. 시국대토론회를 마친 후 중앙로와 광양로터리를 오가는 가두행진도 열렸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열렸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군사독재정권 타도하자'와 '민주헌법 쟁취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평화적 시위에 경찰도 온건히 대처하면서 충돌은 없었다.

▲ <제주신문 1987년 6월23일자 보도사진>
#'민주성금' 모금에 시민들 손길 이어져

그리고 다시 중앙로터리에서연좌농성을 벌이던 중, 밤 11시께부터는 시위 농성자를 위한 시민모금이 이뤄졌다. 시민모금은 시민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많이 모아졌다.

"집회에서 민주헌금을 받는다고 하고, 한번 돌면 만원짜리 5천원짜리 많이 모아졌어요. 그때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경찰과 대치하며 앉아서 연좌농성을 하고있는 상황인데 지나가던 학생이 면도칼을 나에게 주는 것이었어요. 그 학생은 우리도 싸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 당시는 비폭력시위로 가는 상황이었는데 싸워야 할 것 아니냐고 생각했던 거죠. 그만큼 시민들의 호응은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김효철씨, 당시 86학번 재학 중, 6월항쟁 다큐멘터리 '6월나무에서')

#중앙성당에서는 학생 100여명 철야농성 돌입

밤 11시30분께까지 연좌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은 집회를 마치면서 100여명은 중앙성당으로 들어가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철야농성은 6.29선언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된다. 당시 천주교 제주교구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이자 학생운동권진영에서 지도부격이었던 박성룡씨의 얘기다.
"22일 싸움을 끝내고 오늘 해산하면 싸움이 이대로 끝나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22일 집회를 마무리하기 전에 중앙성당에 찾아가 신부님을 만났다. '신부님 시국이 이런 상황이고 시위대가 평화시위를 하고 있는데, 이 불씨가 꺼지면 내일 싸움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룻밤만 신세를 지면 안되겠습니까'하고 요청을 드렸다. 그랬더니 신부님이 허락을 해주셨다. 교육관 2층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이곳에서 농성을 하게 된 것이다."

중앙성당에서 철야농성이 시작되자 시민들에 이어 이번에는 성당 신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농성자들을 위해 신자들은 매 끼니 때마다 밥과 반찬을 손수 만들어 제공해줬다.

"낮에는 시위에 동참해야 하니까 농성자가 한 20여명 정도 있었고 밤에는 100명 정도가 참여했는데 신자들이 식사를 계속 제공해 줬어요. 학교 선배들이나 안면이 있는 시민들은 먹을 것을 사들고 와서 격려도 많이 해줬어요."

▲ <제주신문 1987년 6월23일자>
규모줄고 온건시위로
전국 소강상태 제대생 이틀째 평화시위
제주 중앙성당서 백여명 농성

제주대 학생 1천여명(경찰집계)은 22일 시내 중심지에서 전날에 이어 이틀째 가두시위를 벌인데 이어 이날 밤 11시40분께 학생 1백여명이 중앙성당 내에 들어가 23일 낮 12시 현재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또 학생 2백여명도 중앙성당 진입농성에 동조해 제주대 학생회관에 들어가 철야농성을 벌였다.
제주대 학생 7백여명은 22일 하오 1시께 교내에서 민주화 행진 출정식을 갖고 시가지에 진출했는데 하오 3시께 광양로터리에 집결한 시위학생은 1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시위학생들은 이곳에서 남문로-중앙로, 서광로-서사로, 동광로-동문로 등 세갈래 길로 나누어 가두시위를 벌인뒤 중앙로터리에 집결 연좌, 시국토론회를 벌였다.
학생들은 토론회를 마친다음 중앙로터리-광양로터리를 두차례 오가며 밤늦게까지 반정부구호를 외치면서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한편 이날 오전 제주대 고창훈 교수(행정학과)는 '민주화의 대열에 동참하며'라는 제목의 시국성명을 발표하기도.
이날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에 경찰도 온건히 대처, 상호 충돌은 없었다.
<제주신문 1987년 6월23일자>

#경찰, 3차 출정 필사적으로 차단...총학생회장 등 연행

3일째인 6월23일 오후 1시. 제주대학교 야외음악당에서는 제3차 출정식이 열린다. 출정식을 마친 학생들은 오후 1시30분께 중앙성당 농성자와 합류하기 위해 가두진출에 나선다.

그런데 제주대 교문 앞과 교수아파트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전경들은 전날까지 보았던 전경들이 아니었다. 2개 중대가 배치됐는데 시위가 극렬했던 부산으로 차출되어 갔던 전경들이 제주로 다시 복귀한 것이었다.

이들 전경들은 학생들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경찰과 학생들이 밀고 당기는 식의 가두진출전이 지속되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자 지도부들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전날 집회를 마무리하면서 '23일 오후 6시 중앙로 현대약국 앞에서 집회를 합니다'라는 것을 공고했고, 이 집회 홍보 문구가 제주시내 곳곳에 붙여져 있었던 터라 '시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했던 것이다.

이에 지도부들은 송형관 총학생회장을 필두로 하여 30여명의 별동대를 꾸린 후 밭을 넘어가는 식으로 몰래 시내에 진입하도록 한다. 그리고 오후 6시쯤 지도부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자 학생들로 하여금 개인별로 집결지에 모이도록 한다.

송형관 회장과 별동대들은 중앙로에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시간을 잘못 착각했었던 것일까. 이들은 당초 예정시간 보다 조금 앞서 중앙로에서 시위를 시작한다. 그러자 곧바로 경찰이 출동해 송형관 회장을 비롯해 11명을 강제연행한다.

당시 학습소그룹인 '언더'진영의 지도부격이었던 정원태씨(당시 사학과 재학, 현 제주감협 근무)는 이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오후 6시 현대약국 앞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것이 이미 고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 송형관 총학생회과 1, 2학년 중심으로 별동대를 꾸려 걸어서 시내로 내려가도록 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교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별동대가 내려가는 시간을 감안해, 일정시간이 지나면 교투를 마무리하고 경찰측에는 집으로 가는 척 하면서 현대약국으로 이동한다는 작전이었다. 나중에 교투를 마무리하고 각자 흩어져 중앙로 현대약국 앞에 가보니까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별동대가 먼저 '뜨는' 바람에 11명이 잡혀갔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었는데 경찰이 송형관 회장을 연행하려 봉고차에 태우려고 하니까, 몸집이 크던 송형관 회장이 봉고차 뒷문 양쪽을 붙잡고 끝까지 버티는 바람에 경찰이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별동대 등 연행되자, 즉석에서 '디머'선정해 시위

정원태가 중앙로에 도착한 후, 이곳 주변에는 '디머(주동자)'가 나서기를 기다리는 학생들의 서성거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약속된 시간 1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시위가 시작되지 않자 웅성거림도 많아졌다.

이에 정원태는 현장에 있던 인문대 학생회 부회장인 홍인숙에게 '디머'를 서도록 했다. 요즘 같으면 '준비되지 않은' 학생에게 갑자기 '디머'를 서도록 하면 당황하거나 난색을 표했겠지만, 학습소그룹에서 이념적 정신무장이 갖춰진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거절할 나위가 없었다.

'오더'를 받은 홍인숙은 다른 여학생 1명과 함께 '디머'로 나서 '독재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차도로 나선다. 이에 순식간에 대열이 형성되었고, 시위대는 현대약국 북쪽 방면 도로에 앉아 연좌농성을 벌인다.
'군부독재 타도하자 흘러 흘러~ , 군부독재 타도하자 흘러 흘러~'

연좌농성을 벌일 즈음 하늘은 짙게 어두워졌고 가는 빗줄기가 내렸다.
연좌농성이 시작된지 얼마없어 진압전경이 양쪽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한쪽은 중앙로터리 쪽에서 현대약국 방면으로, 다른 한쪽은 남문로터리 방면에서 현대약국 방면으로 압박해왔다. 이들은 군화소리를 척척내며 시위대를 양쪽에서 틀어막았다.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경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 앉고는, '와서 모여 함께 우리 단결해' 노래를 부르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갑자기 경찰 '사과탄' 터뜨리며 강경 진압 돌변

비폭력 평화시위 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시위대는 어떠한 물리적 방어수단도 준비하지 않았고, 오직 맨 몸으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저항할 뿐이었다.

빗줄기가 다소 굵어진다고 싶은 찰나, 압박해 들어왔던 경찰은 '사과탄'을 마구 시위대 한가운데에 퍼붓는다. '펑'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사과탄이 터지고 매서운 최루연기가 자욱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며 대대적 진압을 시작한다. 이에 시위대열은 얼마없어 흐트러지고 여기저기로 피하기 시작한다.

일부는 중앙성당 쪽으로, 일부는 동문시장 쪽으로, 다른 일부는 당시 현대약국 옆에 소재해 있었던 새한병원으로 피신한다. 중앙성당 쪽으로는 3, 4학년 학생들이 많았고, 동문로터리 방면으로는 1, 2학년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전경들이 발소리를 착착 내면서 우리를 둘러싸더라구요. 너무 무서웠어요. 남학생들이 우리를 보호해주겠다고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찰나 경찰이 바로 최루탄을 쏘더라구요. 우린 아무것도 안하고 노래만 불렀는데... 그래서 우린 병원(새한병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됨)으로 도망갔는데, 그날 저녁 방송뉴스를 보니까 화면이 시위대가 몽둥이로 병원문을 깨고 들어가는 장면부터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방송이 이런거구나 생각했죠."(6월항쟁 다큐멘터리 '6월나무'의 한 여성 출연자)

"별동대 시위 때 총학생회장이 잡혀가 버렸으니까, 어떻게 할 것이냐 하다가 여학생 2명이 디머로 나서 시위가 시작됐다. 집결하여 연좌농성을 시작하니까 경찰이 양쪽으로 진을 치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갑자기 경찰이 사과탄을 던졌다. 우리는 '물러서지 말자'하고 앉아서 버텨 있었는데, 최루연기에 견디지 못해 대열이 흐트러졌다. 현대약국 골목과 새한약국 골목으로 도망갔는데 경찰이 쫓아오지는 않았다. 가면서 보니까 내 옷에는 최루가루 때문에 옷이 하얗게 변해 있었고, 어떤 학생은 구토를 하고 있고, 매서운 연기에 눈물 범벅이 된 학생들이 여기저기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 때 한 학생이 '동문로터리'라고 외쳤다. 그래서 우린 동문로터리 쪽으로 빠지게 됐다."(고성환, 당시 제주대 신세대 동아리)

평화롭게 이뤄지던 시위가 최루탄을 앞세운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분위기는 일순간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중앙성당 쪽으로 이동한 학생들은 그쪽 방면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고, 동문로터리 방면으로 이동한 학생들은 그쪽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특히 동문로터리 쪽 팀의 시위는 매우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누가 지도부이고, 누가 '디머'인지 조차 구분이 안되었고, 자발적으로 차도에 뛰어든 학생 50명 정도가 노래를 부르면서 시위를 벌였다. 소수로 출발한 시위대는 갑자기 인원이 늘었다. 당시 지하상가 공사 관계로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는데, 시위대가 차도를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하자 지나가던 행인과 인근 상가 시민들이 모두 몰려들었던 것이다.

#페퍼포그 발사하려는 순간 한 시민이 막아서, 상황 반전

페퍼포그를 앞세운 진압전경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이들 쪽으로 천천히 진압해 들어왔다. 시위대와 진압전경, 그리고 진압전경 뒤에는 이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또다른 시민들이 있었다.

제대신문은 당시 학생 1000여명과 시민 2000여명이 운집해 있었다고 보도했다. 아무튼 많은 인파가 몰린 가운데 경찰의 진압이 곧 시작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시위대 속에서는 '지도부 나와!'라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지도부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3, 4학년과 지도부 대부분은 중앙성당 쪽으로 집결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문로터리 집회는 전혀 예견된 상황이 아니었다.

시커먼 페퍼포그가 최루연기를 발사하려는 듯 움직임이 감지되는 순간, 상상도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한 시민이 페퍼포그 앞으로 달려가 연기가 나오는 구멍을 몸으로 막고 서 버린 것이다. 순간 진압경찰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학생이라면 바로 연행해 갔을터인데,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고, 최루탄을 쏘지 말라며 한 시민이 몸으로 페퍼포그를 막고 있으니 경찰도 순간적으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던 것이다.

이 상황은 시위학생들에게 용기백배를 불어넣는 계기로 작용한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루탄 난사에 기진맥진해 있던 터인데, 이 광경을 보고나서는 힘이 용솟음친다. 시위대와 페퍼포그가 있는 거리가 대략 20m정도 됐었는데, 시위대는 '와'하면서 달려가서 페퍼포그를 밀쳐버린다.

#페퍼포그 밀쳐 버리고 시위 격렬양상 변모...지도부도 '통제불능'

페퍼포그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경찰의 진압용무기는 사과탄만 존재하게 됐다. 이번에는 거꾸로 경찰이 포위되는 형국으로 상황은 돌변한다.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경찰 뒷편에서 구경하던 시민들이 시위대에게 지지를 보내며 경찰을 자연스럽게 포위해 버린 것이다.

"경찰이 거꾸로 시위대에 포위됐다. 시민들은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결국 경찰은 갖고 있던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는 수모를 겪게 된다."(고성환)

맨 앞에 막고 있던 경찰력을 무력화시킨 다음부터는 '통제불능'의 상황으로 빠져든다. 가뜩이나 최루탄 난사로 흥분해 있던 시위대는 경찰과 치열한 투석전을 벌였다.

밤 10시30분께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세워져 있던 도로포장용 중기 1대를 밀고 나오고 제주시청 소속 제주 7가1050호 지프를 뒤집어 엎기도 했다. 어디선가 '드럼통'하는 소리가 들렸다. 흥분한 몇몇 학생들이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대자 전경들을 행해 드럼통을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경찰에 겁을 주기 위해 시도된 이 드럼통은 석유가 아니라 물이 담겨져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위는 지도부의 통제가 전혀 안되는 극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때 화염병이 투척되는 등 시위가 극렬해졌다는 보도도 있으나 화염병이 어떤 경로로 등장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투석전이 벌어졌을 때 여학생들과 시민들은 보도블럭을 깬 돌맹이를 가방에 넣고 짊어져 나르거나, 손으로 들고 앞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어요."(한 시민)

▲ <제주신문 1987년 6월24일자 보도사진>
상황을 중앙성당 쪽 시위대에 있었던 정원태의 얘기다.
"한 학생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통제가 안된다고 했다. 도로포장용 중기가 엎어지고, 지프가 뒤엎어졌고 했다. 순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정원태는 동문로터리쪽 시위대를 중앙성당 방면으로 이동할 것을 전달한다. 극도로 흥분되고 격앙됐던 동문로터리쪽 시위대를 진정시키는 일이 급했다.

대열이 어느정도 집결되자, 직전 총학생회장이었던 박희수가 한 차량위에 올라가 학생들을 설득한다. 그는 목이 쉴때까지 '비폭력'을 호소하며 연설을 했다. 그래도 학생들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자 이번에는 황인호(그는 1986년 인문대학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가 총장실 점거사태로 제명되었고, 그해 12월 고창후와 함께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5월 출소한 상황이었다.)가 "우리는 질서정연하게 시위를 해야 한다. 절대 무기를 쓰면 안된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설득에 시위대는 차츰 진정되었고, 다시 전날과 마찬가지로 평화시위를 시작한다. 이들은 다시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행진을 하다 밤 11시30분부터 중앙성당에서 범도민시국대토론회를 개최한다. 이 때 참석한 인원은 대략 1000여명 정도.

밤이 깊었으나 시민들도 쉽게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시위대는 시국대토론회를 마친 후 '연행학생 석방'을 경찰측에 요구하며 농성을 계속했다. 24일 새벽 1시10분께 연행됐던 23명의 학생들이 모두 석방됐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난 후에야 시위대는 농성을 풀고 모두 해산했다.

▲ <제주신문 1987년 6월24일자>
제주대생 격렬시위
오늘새벽 성당서 농성풀고 모두 귀가

연 3일째 가두시위를 벌인 제주대학생 7백여명(경찰집계)은 23일 제주시내 도심지에서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하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학생 1백50여명은 이날 하오 1시께 교내에서 민주화출정식을 갖고 교문을 나서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강제진압을 하자 돌을 던지며 대치했다.
하오 7시께 시내에 진출한 시위학생들은 경찰이 중앙로에서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자 상가쪽으로 흩어지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는데 중앙로주변 상가주민들과 행인들은 도심지에서 처음으로 최루탄 투척과 투석전이 벌어지자 큰 불편을 겪었다.
시위학생들은 밤 10시30분께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세워져 있던 도로포장용 중기 1대를 밀고 나오고 제주시청 소속 제주 7가1050호 지프를 뒤집어 엎기도 했는데 하오 11시30분께 지난 22일부터 학생 1백여명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중앙성당으로 가 합류했다.
시위학생들은 24일 새벽 1시30분께 학교와 성당측의 주선으로 연행학생들이 모두 풀려나오자 농성을 풀고 귀가했다.
<제주신문 1987년 6월24일자>

#집회 하루쉬자, 일부 비운동권 총학생회에 '알송달송 항의'

새벽 귀가한 학생들은 24일 오후 5시께 시민들과 함께 다시 중앙성당에 모여 집회를 연다. 이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6월26일 열릴 범국민 평화대행진를 강행키로 결정했다.

그런데 6월25일 하루 쉬고 26일 집회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연일 계속된 싸움에 체력이 많이 소진된 점도 있었지만, 유인물 등 물량이 확보되지 않은 문제가 컸다. 학생들의 주장을 시민들에게 알리려면 유인물 배포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하지만 유인물이 턱없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25일 집회를 쉬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천만다행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유인물이 부족한 관계로 25일 집회를 하지 않고 26일 집회를 결정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평소 집회에 한번 참석도 안하던 모 학생기구 간부들이 총학생회를 찾아와서 '왜 집회를 안하느냐'며 행패를 부리다 갔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없어 그날 집회를 안하기를 잘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경찰정보를 역으로 입수한 결과 25일 집회를 한다면 이번 기회에 학생운동권을 완전히 들러내 버리겠다고 경찰이 벼렀다는 것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도 25일 하루 집회를 쉰 것과 관련해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있었다."(정원태)

26일 평화대행진이 결정되자 학생들은 25일 밤 제주시내 곳곳에 집회계획과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도민 민주화 투쟁일지'를 부착했다.

이 무렵 육지부에서는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집회가 열릴 때면 도로를 지나가던 차량들은 일제히 멈추고 경적을 울려댔고, 빌딩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회사원들은 두루마리 화장지 등을 거리에 펼쳐 날리는 것으로 시위대에 지지를 보냈다.

제주 역시 비슷한 분위기가 일었다. 학생들이 외치는 '군사독재정권 타도'와 '호헌철폐'는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강경진압이 이뤄질 때면 시민들이 먼저 나서 경찰에 항의했다. 시민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 '민주성금' 모금함만 보더라도 그 호응정도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전 국민적 항쟁으로 연일 계속되는 시위에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이 시기 초긴장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권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시민의 힘'은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헤드라인제주>

<6월항쟁 주도 송형관 총학생회장, 그 이후는...>

1986년 11월 실시된 1987년도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운동권출신의 현길호 후보가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경찰에 전격 연행되어 유치장에 구금됐는데, 후보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현길호는 옥중당선된다. 그러나 선거가 실시되기 하루전, 제주대학교 당국은 긴급 학처장회의를 열어 현길호를 제명처분한다.

당시 김두희 총장과 학장, 처장들은 운동권학생의 학생회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제명'이라는 야비한 결정을 내렸다. 제주대학교 개교 이래 '지성'이 '독재정권'의 하수인임을 자처하는 가장 치욕스런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 1987년 제주에서의 6월항쟁을 주도했던 송형관씨. 그는 현재 CBS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6월항쟁 당시 학생운동의 '구심'으로서 가두시위를 진두지휘했던 송형관은 1987년 3월 실시된 총학생회장 재선거에서 당선된 인물이다.

그는 써클연합회장이었던 김정열씨(현 느영나영 영농조합법인 대표)와 비슷한 우람한 체격에 통솔력 또한 뛰어났다. 그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임할 때, 전국적으로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부천서 성고문사건으로 정권의 도덕성이 땅에 곤두박질치고, 정권연장음모가 노골적으로 획책되던 시기다.

그는 이러한 국내 정치상황과 잘 연계해 학생들에게 다가섰다. 학습소그룹인 '언더' 출신으로, '정치적 무장'이 잘 되어 있던 그는 종전 학생운동의 한계였던 '대중없는 선도적 투쟁'을 과감히 뒤로하고, '대중적 정치투쟁'을 지향한다.

운동권중심의 소수투쟁 보다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시국에는 관심이 있으나 차마 용기를 내어 집회대열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들,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가진 학생들을 포용하고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펼쳤다.

1987년 4월, '4.3대자보' 사건으로 촉발된 제주대 전 교생의 중간시험 거부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총학생회의 '대중투쟁' 노선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1987년 총학생회는 종전 총학생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가장 달라진 점은 반정부 투쟁집회를 '총학생회'가 직접 주최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물론 5.18집회에서 '언더'진영에서 투위를 발족시키며 싸움을 전개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집회 및 시위는 총학생회가 직접 주도하고 나선다.

종전 '제민투위' '민주헌법쟁취투쟁위' '민주화실천투쟁위원회' 등 각종 투위가 언더조직을 중심으로 해 발족되어 싸움을 전개했던 것과 비교하면 분명 달라진 점이다.

물론 이러한 '대중투쟁' 노선을 지향하게 된 것은 전국적 상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1986년 말, 건국대에서 벌어진 애학투련 싸움에서 정권의 사상초유 폭압적 진압은 대중에 기초하지 못한 투쟁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전해주었다. 선도하는 소수의 '전위'보다는 '대중'을 기초로한 싸움만이 승리하는 싸움을 일굴 수 있다는 교훈은 이미 언더진영에서도 넓게 각인되고 있었다.

1987년 총학생회가 언더진영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외형적으로는 독자적 싸움을 일구고, 또한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도 '비운동권' 진영까지 아우르는 정책사업을 펼친 것은 6월항쟁의 주역을 '운동권'이 아니라 '시민'으로 승화시키는 결적정 모티브가 되었다.

이후 1987년 총학생회의 선례는 1988년 '통일투쟁'과 1989년 '자주적 학생회'에서도 그 흐름을 갖게 한다.

송형관씨는 졸업 후 1991년 제주일보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CBS로 자리를 옮겨, 현재 CBS 보건복지부 출입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1987년 6월항쟁을 진두지휘하고 있을 무렵,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계신 그의 아버지가 중앙로 시위현장에 찾아왔다고 한다. 경찰이 시위 주동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속셈으로 안덕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그의 아버지를 회유해 집회현장까지 오게 한 것이다.

아들이 데모하는 것을 만류하라는 경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오히려 그에게 용기를 북돋고 돌아간다. 이 이야기는 당시 학생운동권 진영에 널리 알려졌다.

"기관에 이끌려서 아버지가 중앙로에 오셨어요. 아버지는 저를 보더니 '하려면 제대로 해라'고 얘기하셨죠. 그 얘기 뿐이었어요. 다른 별 말씀 안하시고. 지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제가 2대 독자인데, 부모님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2대 독자가 시위하다가 잡혀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많으셨겠죠. 그런데 경찰에 이끌려 시위현장에 와서는 '제대로 하라'는 말에 힘을 많이 얻었어요."

6월항쟁 20주년을 맞은 감회를 묻는 질문에 그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것을 아쉽게 생각한다"며 "지금도 6월의 뜨거운 투쟁의 열기를 느끼고 있고, 어쩌면 지금도 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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