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적 '양동작전', 6월항쟁 '촉발' 우스꽝스런 '짝퉁 전경'들 '쩔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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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적 '양동작전', 6월항쟁 '촉발' 우스꽝스런 '짝퉁 전경'들 '쩔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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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10] 1987년 6월21일, 제주 첫 '대규모 가두시위'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보고자 합니다. <헤드라인제주>
▲ <제주일보 보도사진, 1987년 6월22일자>

[10] 1987년 6월21일, 제주 첫 '대규모 가두시위'

1987년, 5월18일 터져나온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은폐조작의 진상과, 6월9일 연세대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은 거센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연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은 최남단 섬 제주에도 전해온다.

하지만 6월10일 시국대토론회를 개최한 후 제주는 극히 평온한 모습이었다. 제주대의 경우 6월10일 시국대토론회 후 교문앞 투석전을 벌인 후 송형관 총학생회장과 서창우 부회장, 송영란 총여학생회장, 김정열 써클연합회장, 오용욱 사회과학대 학생회장, 김동철 인문대 학생회장 등 6명이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단식농성을 벌인다.

이날 단식투쟁은 단식자 6명만 남기고 총학생회 사무실 문을 꽁꽁 걸어잠근 상태로 이뤄진다. 종전 총학생회에서 단식투쟁을 할 때 몰래 초코파이를 먹었느니, 우유를 먹었느니 하는 '억울한 소문'이 나돈 전례가 있어 이러한 뒷말을 막기 위해 아예 문을 걸어잠그고 단식을 했던 것이다.

단식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고, '오로지 굶어야 한다'는 사명의식만 있었다. '무조건 굶자'로 시작된 단식투쟁은 4일만인 6월13일 단식 마무리 집회를 하다가 줄줄이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후 제주대에서는 이렇다할 시위가 없었고, 극히 평온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제주대학교의 경우 6월22일부터 26일까지 기말시험이 예정돼 있어 대다수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강의실에서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제주대 학생운동권의 지도부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육지부에서는 계속해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보도를 통해 전해지고 있으나, 정작 중요한 시점에서 제주에서는 기말시험 기간에 접어들면서 1학기 투쟁을 마무리해야 할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5.18 추모미사 및 중앙성당내 농성 주도 후 경찰의 추적으로 잠시 은둔하다 6월 중순께 대학을 찾은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 박성룡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5.18추모행사를 했는데, 그 이후에는 특별한 행사가 없었어요. 6월10일 학외인사들을 초청하여 시국대토론회를 하고 교문앞 투석전을 한번 벌인게 전부였죠. 6월10일 이후는 정말 평온했어요. 오랫만에 학교에 올라오는데 그날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 족구하는 학생들도 보였구요. 그 모습 보면서 전국으로는 투쟁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보여줄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 조만간 투쟁을 할 수 있도록 유인물을 만들고 뭔가 준비해야겠다 하고 어느 후배에게 제안을 한 적이 있어요."

박성룡의 이같은 고민은 다른 지도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동권진영으로 구성된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 써클연합회, 사회과학대 학생회, 인문대 학생회 등 5개 학생회장들도 전국적 분위기에 맞춰 어떻게 투쟁을 일궈낼까 하고 고민했다.

학습소그룹 조직인 소위 '언더' 진영의 지도부격인 정원태(당시 사학과 2학년)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당시 언더진영은 정원태를 주축으로 한 소위 '패밀리'(당시 언더진영에서는 비슷한 성향의 학습소그룹을 한데 묶어 패밀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강승림(당시 경영학과 재학)을 주축으로 하는 또다른 패밀리 등 크게 2개 패밀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2개 패밀리 진영은 5.18집회에서 보여준 '분열상' 때문에 이를 수습할 묘책찾기에 골몰해 있었다. 6월투쟁에 있어서는 전국적으로 전개됐던 6월10일 국민대회가 끝났기 때문에 언더진영에서도 사실상 상반기 싸움은 끝났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6월10일 국민대회 이후에도 육지부에서는 시위가 한층 더 격렬해지는 양상을 보이자, 언더진영에서도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원태씨의 설명이다.
"6월10일 제주에서는 국민운동본부 주최가 아니라 총학생회 주최로 시국대토론회가 열리고 한차례 교문앞 투석전을 벌인다. 그리고 송형관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5개 운동권 학생회 회장들은 단식에 들어가 13일쯤 끝나는데, 지도부에서는 이 단식을 끝으로 제주에서는 상반기 모든 싸움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말시험도 코앞에 닥쳐 있었고. 그런데 소강상태에서 육지부의 추이를 지켜보던 중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들이 많이 찾아왔다. 싸움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제주에서 6월싸움을 조기 마무리한 것에 대한 '불만'은 1, 2학년을 중심으로 크게 분출됐다. 지도부들이 계속 머뭇거림을 보이자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왜 싸움을 하지 않느냐. 우리도 전국적 민주화의 대열에 나서야 할 것 아니냐'는 강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운동권진영의 1, 2학년 학생들은 각 학과에 들어가 자발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전국적 상황이 초비상인데, 제주대학교 학생들만 기말시험을 보며 중요한 시기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1, 2학년을 중심으로 이뤄진 학과별, 학년별 논의는 '기말시험 거부'의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사회과학대학과 인문대학에서 이러한 기말시험 거부논의는 한층 무르익는다. 운동권이 아닌 학생들 사이에서도 전국적 상황이 심각함을 인식하고 기말시험 거부논의에 진지하게 참여했다.

#갈등심화 언더진영 2개 '패밀리', '6월싸움' 합의

이러한 후배들의 제안과 육지부 상황을 지켜보던 정원태씨는 상대 패밀리 진영의 지도부격인 강승림을 직접 찾아가 만난다. 그리고는 현 시국상황에 대해 얘기하고, 제주 6월싸움에 대한 합의점을 찾게 된다.

"당시 강승림을 만나서 말했어요. 싸워야 되지 않겠냐고. 여러가지를 논의했어요. 5.18집회 때문에 감정이 안좋을 때였어요. 그렇지만 합의를 했어요. 싸우자는 것 하나 하고, 언제 하자는 것 하나, 그리고 원칙을 정했어요. 원칙은 서로 양 패밀리에서 갖고 있는 역량(인적역량)을 총동원하자. 그리고 지도부가 앞장서자는 것이었어요."

이 양대 패밀리 지도부가 이러한 합의를 할 무렵, 사실 여러 루트를 통해 이러한 논의들은 왕성하게 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대 패밀리 지도부라고는 하지만, 언더진영이나 학생운동권 진영에서 공인된 직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그 당시만 하더라도 언더진영에 소속되어 체계적인 사회과학 학습을 받은 소위 '인자'들도 실질적 지도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특히 1, 2학년의 경우 더욱 그렇다. 자신이 소속된 '윗 줄기'가 어떻게 되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갈비패'로 불리우는 안기부에서 조직사건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더조직에서 '조직계보'는 특급 기밀사항이었다.

정원태와 강승림의 만남 이후, 언더진영은 6월싸움을 끝내면서 7월 김윤삼 학생이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내부적으로 치열한 논의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다시 몇가지 원칙을 세운다. 학내외를 분리하는 방침(당시에는 학외인사의 경우에도 학생운동 진영과 밀접한 결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통일된 지도부를 세우자는 원칙을 정한 것이다.

또 지도부로 선정된 사람은 원래 소속된 패밀리 회의에 들어가서도 안된다는 원칙도 합의된다. 이에따라 1987년 하반기부터는 소위 양대 패밀리에서 2명씩 나와서 통일된 지도부를 구성해 운영하는 체제를 갖는다. 소위 말하는 '언더 4인지도부'가 형성된 것이다.

#"최소한 육지로 간 전경들 내려오게끔 해야 할 것 아니냐"

다시 얘기를 바꿔, 언더진영에서의 '언제 싸우자'는 결정이 이뤄짐과 동시에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 써클연합회,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인문대 학생회 등 운동권진영이 포진해 있는 5개 학생회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계획과 전술을 마련한다.

이것이 바로 6월21일 대규모 가투계획이다. 이 계획은 6월 16일을 전후해 계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 마련된 이 계획의 핵심내용은 역량을 모두 제주시내 한복판으로 집결시켜 시위를 하자는 전술이었다.

이날 가두투쟁이 제안된 것은 육지부의 시위가 거세지면서 제주 전경들 중 상당수가 부산으로 지원나갔다는 경찰쪽 정보(?)가 입수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박성룡씨의 설명이다.
"가두시위를 해야겠다는데 의견이 일치했어요. 제주대학교가 외곽에 위치하다보니 교문 앞에서 아무리 싸우더라도 이 내용이 시민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문제가 있잖아요. 그래서 일단 가두투쟁을 해야한다고 결정됐고, 많은 고민 끝에 써클연합회 회장인 김정열씨가 주동이 되어서 학내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정되었어요. 저희들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부산지역 시위가 심해서 제주지역 경찰력이 부산으로 갔다는 정보를 듣게 됐거든요. 그래서 시내에 내려가도 우리를 막을 경찰력이 별로 없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디데이를 21일로 정했어요. "

김정열 당시 써클연합회장의 얘기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우리가 너무 무기력하게 있는 것 아니냐. 한번 해보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계속 격화되고 있고, 제주도 전경들이 부산까지 올라가 시위를 막는다고 하는데, 제주도 전경들을 최소한 제주도로 내려오게끔 해야 할 것 아니냐. 최소한 운동한다는 사람으로서의 양심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래서 좋다. 21일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자. 그러나 절대 교문 안에서만 싸우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 그래서 송형관 회장하고, 소위 말하는 언더 지도부들이 결의를 모으게 된거죠."

#6월19일 '공개'-'언더' 지도부회의, '양동작전' 비밀리에 계획

가두시위 계획이 마련된 후 며칠 지나 6월 19일쯤, 5개 학생회장과 언더진영의 지도부격 대표들이 학생회관 건물내에 있는 한 사무실에 모였다. 지도부회의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는 당초 계획했던 투쟁전술에 변화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꺼번에 모두 시내로 내려가 시위를 할 경우 대대적 연행사태가 발생하면 제주대 학생운동권 조직은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다. 또한 경찰병력이 대거 육지부로 차출되어 갔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경찰병력을 파악할 길이 없고, 경찰력과 싸워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였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한 자리에 모인 지도부들은 타당성이 있다고 동의하고 싸움방법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전술이 바로 '양동작전(陽動作戰)'이다. 써클연합회장인 김정열이 학내를 책임지고 교문앞 투쟁을 전개하면, 그 사이 다른 지도부들은 제주시내로 빠져나가 도심지 한복판에서 가두투쟁을 벌이자는 작전이었다.

또한 6월22일부터 26일까지 기말시험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21일 출정식을 하기에 앞서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여 기말시험 거부를 결의키로 결정했다.

당시 지도부회의에 참여했던 김정열씨의 설명이다.
"비상학생총회를 하고, 이러한 양동작전을 하자는 결의는 최종적으로 하루전에 확정되었다. 그 전에 19일 지도부 회의를 하면서 내가 조건을 제시했는데, 첫째는 소위 운동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싸우자.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운동권진영이)나누어져 있었으니까. 두번째는 이번 싸움은 학내에서 하지 말고 거리로 나가자. 세번째는 거리로 나가되 84학번(당시 4학년)이 중심이 되어 공동지도부를 구성해 투쟁하자. 거리에 나가는 부분은 모두 연행될 것을 각오한 것이었다."

이 결정사항은 매우 극비리에 전파되었고 준비가 되었다. 혹시나 정보가 새어나갈 경우 이러한 시위계획이 무산될 우려도 없지 않았다. 또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학내에 안기부와 정보형사들이 총장실 옆 사무실에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은 매우 컸다.

따라서 학생회와 언더진영에서는 가두시위 계획은 철저히 숨기고, 다만 21일 집회가 시작되기 1시간전에 기습적으로 학내집회가 있다는 사실만 공표하기로 한다.

정원태씨의 얘기다.
"경찰과 학교당국의 감시가 아주 심했다. 그래서 양동작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화장실 같은데 '교문앞 투쟁'을 준비 중에 있다는 내용의 소대자보 같은 것을 만들어 붙인다. 일종의 교란 작전이었다. 사실 나중에 이 작전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경찰병력은 시내가 아니라 학교 쪽으로 집결되었다."

한편 하루전인 6월20일에는 총학생회와 언더진영의 학생들은 각 학과에서 기말시험 거부를 유도하고 나선다. 총학생회의 김성대 총무부장을 비롯한 '공개'진영의 간부들은 도서관 등을 돌며 시험거부와 군사독재정권 타도투쟁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선전전을 펼친다. 언더진영 학생들의 선전전이 효과를 보기 시작한 듯, 사회과학대학 일부 학과에서는 기말시험을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대자보로 통해 알린다. 분위기는 물씬 달아오르고 있었다.

#출정식 30분만에 마치고 교문앞 진출...가투팀은 비밀리에 학교 빠져나가

드디어 D-데이인 6월21일. 오후 1시쯤 학생 300여명(제대신문 보도 집계인원)은 제주대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비상학생총회 및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민주화투쟁 출정식'을 가졌다.

그런데 송형관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소위 '민주 학생회장'들은 보이지 않았다. 김정열 써클연합회장과 서창우 총학생회 부회장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 시각 송형관 회장을 비롯한 다른 지도부들은 학내를 몰래 빠져나가고 있었다.

김정열의 사회로 진행된 비상학생총회와 출정식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모두 마무리됐다. 비상학생총회에서는 박희수 전 총학생회장이 기말시험을 거부하자는 제안을 했고, 참여한 학생들이 박수로 화답하면서 일사천리로 끝난 것이다.

그러자 김정열은 곧바로 참여학생들을 이끌고 교문밖으로 나선다.

"일요일이었다.  비상학생총회와 더불어 출정식을 가졌는데, 혹시 경찰이 '양동작전'을 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챌까봐 당일 집회 1시간 전에야 공고를 했다. 그래서 경찰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요즘 같으면 총학생회장이 없는데 어떻게 비상학생총회를 갖겠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다. 누구나 큰 마음 먹고 주도해 보겠다면 하는 것이었다. 비상학생 총회는 내가 사회를 봤다. 총회에서 박희수 직전 총학생회장이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가두투쟁에 나설 것을 제안해 이견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는데, 비상학생총회와 출정식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소요된 시간은 전부 합해봐야 30분 이내였다."(김정열)

교문 밖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제주대 입구 외솔나무가 있는 곳까지 진출한다. 그러자 얼마없어 전경 100여명이 출동해 이들을 가로막는다. 이때부터 경찰과의 대치전이 시작된다. 이들은 제주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한치 물러섬 없이 격렬히 싸움을 벌였다.

#중앙로 도착한 가투팀, 구호소리에 도로점거 시위 시작

이에앞서 같은날 낮, 송형관 제주대 총학생회장, 송영란 총여학생회장, 오용욱 사회과학대 학생회장, 김동철 인문대 학생회장(국문)등 4개 대학 학생회장은 박성룡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 등 10여명과 함께 인문대학 뒷길로 대학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산을 하나 넘어 제주산업정보대학으로 걸어서 이동한 이들은 버스를 타고 서귀포로 이동한 후, 다시 버스를 갈아탄 후 1100도로를 넘어 제주시 동문시장쪽으로 이동했다.

박성룡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과 같으면 그냥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겠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정보형사들이 이미 얼굴이 노출된 학생회 간부들과 언더진영 지도부를 잡아들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내로 이동하기 조차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하고 학생회장들, 그리고 얼굴이 많이 노출된 지도부 몇명하고 12명쯤이 학교 뒷산을 넘어 버스로 돌고 돌아서 동문시장까지 무사히 들어가게 됐죠. 그 때 날씨가 약간 가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어요. 중앙로 현대약국 옆에 보면 작은 골목 시장이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서 일단 숨었죠. 시장통은 제일 숨기 좋은 좋은 곳이라 생각했어요."

지도부들의 이동과 동시에, 언더진영에 소속되어 있는 학생들도 각 소속단위로 은밀히 '오더'를 내려받고는 삼삼오오 중앙로로  이동했다.

▲ 제주시 중앙로 현대약국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


이들의 이동이 끝난 후, 오후 2시10분쯤, 잠잠하던 시장 골목길에서 우렁찬 구호소리가 들렸다. 제법 체격이 좋은 송형관 총학생회장이 한쪽 팔을 높이 치켜들고 '독재정권 타도하자' '4.13호헌조치 철회하라' '직선제 개헌 쟁취하자' 구호를 외쳤다. 이 구호소리를 신호로 해 이미 언더진영 지도부로부터 '오더(order)'를 받고 중앙로 현대약국 인근에 포진해 있던 학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헬맷 철망도 내리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전경들...진압 엄두도 못내"

이윽고 송형관은 집결한 학생들을 선도하며 현대약국 앞 차도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다. 당시 제주도경이 중앙로 서쪽 관덕정 옆에 위치해 있어 요즘 같았으면 5분도 안돼 출동했을 터이지만 그날은 달랐다. 시위가 시작된지 한참이 지났지만 진압경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위가 한참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호응과 함께 그 수가 늘어나자 시위대는 아예 중앙로 차도에 앉아서 연좌농성을 벌인다.

▲ 제주시 중앙로터리까지 진출해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는 시위대. 대열 맨 앞 '군사독재정권 타도하자'라는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송형관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두개조로 나누어 시위를 시작한다. 중앙로 현대약국 앞에서 시위를 할 때 시민들이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학생들의 주장을 백번 이해한다', 그러면서 지지를 보내는 거예요.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경찰입장에서는 진압할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시위가 시작됐을 때 학생들 숫자가 100명 이내였는데, 시민들이 순간적으로 합세했어요."

당시 출동한 경찰에 대해서도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전해진다. 송형관씨의 말이다.
"우리가 중앙로 차도 한복판에서 시위를 벌이니까 얼마없어 경찰이 출동하기는 했어요. 그런데 진압전경 복장을 한 전경들을 가만히 보니까, 시위를 막는 사람들이 40-50대 경찰들이었어요. 내가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면서 보니까 시위진압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어요.(웃음) 전경헬맷 철망도 내리지 않았고, 보통 배가 많이 나와 있었던 아저씨들이었요."

#제주대 입구팀, 경찰 저지선 뚫고 8km 시내 행진 시작


한편 같은 시각 제주대 입구 외솔나무 앞에서는 시위참여학생들이 계속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해 500명이 족히 넘었다. 김성대 총학생회 총무부장 등 선전팀은 본관 3층 도서관으로 걸음을 향했다. 이들이 현재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알리며 함께 가두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자 도서관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와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외솔나무 앞에서 대치하던 전경들의 모습도 우스꽝스러웠다. 날렵하고 매서운 눈매를 가진 전문 진압 전경들이 아니라 배가 불룩불룩 튀어나온 아저씨들이 진압복과 진압헬맷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6월10일 이후 제주대에서 별 움직임이 없자 병력이 대부분 육지로 올라가 버린 것이었다.

지루한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맨 앞에 서서 시위를 진두지휘하고 있던 김정열은 묘책을 생각해낸다. 전경들을 꼭 밀어서 저지선을 뚫을게 아니라, 도로변에 위치한 옆 밭을 통해 우회하는 방법으로 시내로 가자는 생각이었다.

"대치하며 싸움을 하다가 문뜩 경찰이 막고 있는 도로를 지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시내에서는 싸움이 시작될 시간이었으니까. 한시가 급했다. 무조건 시내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위대열에게 도로 옆 밭으로 돌아서 경찰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을 우회하여 내려가자고 했다. 그래서 모두들 밭으로 들어가서 경찰이 주둔해 있는 곳을 우회해서 시내로 행진하게 된 것이다. 경찰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제지하지 않았다."

경찰 저지선 옆 밭을 통해 경찰 등뒤로 빠져나온 이들은 목석원을 지나며 장장 8km의 행진을 시작한다. 시내행진은 지금 집회에서처럼 천천히 걸어서 가는 형태가 아니라, 뛰듯이 하며 갔다. 시간이 급했기 때문이다. 많은 대열이 행진하며 '독재타도'를 외치자 이 구간의 교통은 극심한 정체를 보였다. 교통체증에 더딘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학생들도 이 광경을 보고는 내려서 합류하기도 했다.

김정열씨의 얘기다.
"그날 시위 하기 전에 최소 5백명 정도가 도서관에서 공부한다. 그래서 최소한 이 학생들만큼은 내가 책임지고 함께 동참하도록 해서 내려가도록 하겠다. 이렇게 장담했었죠. 실제 집회가 시작되니까 시험거부하고 몰려들었는데, 한 5백명쯤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 학생들 이끌고 제주시내로 내려가기 시작한거죠. 내려가다 보니까 버스가 막히니까, 버스에 타고 가던 학생들도 내려서 대열에 동참했어요."

▲ 제주시 중앙로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 '민주헌법 쟁취'와 '호헌철폐' 현수막을 앞세운 학생들은 21일 비폭력 시위를 벌였다.

#갑자기 불어난 시위대열에 경찰들 눈치 살피며 '자진해산' 종용'

다시 제주시내 상황으로 얘기를 돌리면, 송형관 회장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는 중앙로는 완전 해방구였다. 오후 3시쯤, 시위대는 중앙로터리까지 진출해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민주헌법쟁취' '호헌철폐' 등 플래카드를 내걸고 인도에 서있는 시민들을 향해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중앙지하상가가 공사 중이어서 중앙로터리를 중심으로 해 전경이 일부 배치됐지만, 계속해서 불어나는 시위대 규모에 경찰은 진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부 경찰 간부들은 시위대 지도부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진 해산'만 종용할 뿐이었다.

▲ 제주시내 중심가에서 시위를 전개한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중앙로터리와 현대약국 사이를 완전 점거하고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는 함성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제주대 입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김정열 써클연합회장 주도 시위대가 경찰저지선을 뚫고 시내로 행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곳 중앙로에도 전해진다. 순간, 시위학생들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함성과 환호가 터져나왔다.

▲ <제주신문 1987년 6월22일자>

제대생 5백여명 가두시위
최루탄 투척.투석없이 평화적으로 끝나

제주대학생 5백여명(경찰추산)이 21일 하오 제주시 중앙로터리와 광양로터리 등 도심지에 진출, 호헌철폐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하오 2시께부터 시작된 학생가두시위로 인해 시위대가 자진 해산한 하오 7시까지 5시간동안 시내 도심 곳곳에서 차량통행이 차단됐다.
그러나 이날 시위는 학생들이 비폭력을 내세웠고 경찰도 강제진압을 억제하는 등 서로의 자제로 인하여 최루탄 투척이나 투석전없이 평화적으로 끝났다.
제주대 학생들은 이날 하오 1시께 교내에서 민주화투쟁 출정식을 갖고 학생 2백여명이 시가진출을 위한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학생들이 제주대입구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사이에 미리 시내에 내려와 있던 학생 1백여명이 하오 2시10분께 종합시장 입구에서 갑자기 거리에 뛰어들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면서 연좌농성을 벌여 이때부터 중앙로 차량통행이 막혔다.
하오 3시께 3백여명으로 불어난 시위학생들은 중앙로터리에 진출, '민주헌법쟁취' '호헌철폐' 등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국토론회를 벌였으며 인도의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노래를 부르며 한때 탑동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던 학생들은 하오 4시50분께 남문로터리에서 대학에서 내려온 학생들과 합세, 5백여명으로 불어났다.
시위학생들은 이어 광양로터리에서 한때 경찰과 대치하며 민정당 제주도지구당사 앞까지 진출했다가 하오 7시께 자진 해산했다.
이날 가두시위가 벌어지자 도심지 일부 상가에서는 셔터를 내리는 모습도 보였는데 경찰은 한 학생이 화염병을 소지한 것을 사전에 적발, 회수하고 이 학생을 지도교수에게 인도했다.
한편 시위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은 학생들의 비폭력가두시위와 경찰진압과정에서의 자제로써 시위가 평화적으로 끝난 것을 무척 다행으로 생각하는 모습들이었다.
<제주신문 1987년 6월22일자>


<김정열씨와 정원태씨, 그 이후는...>

 

   
 
  ▲ 당시 써클연합회장을 맡아 제주 6월항쟁을 주도했던 김정열씨.  
 

[김정열] 82학번인 김정열 당시 써클연합회장은 문학동아리 신세대 출신이다. 군복부를 마치고 1986년 2학기에 복학해 그해 선거에서 써클연합회장에 당선된다.
송형관 총학생회장과 비슷한 우람한 체격의 그는 '패기와 박력'으로 학생운동의 최일선에 선다. 1987년 6월 보여줬던 그의 특유의 아집과 자신감, 특히 지도부회의 중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500여명쯤 되는데, 그 학생들은 내가 책임지고 시위대열에 합류시키겠다'는 발언은 그만의 자신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1987년 2학기를 마치고, '자퇴'했다. 그해 2학기에는 또다시 총장실 점거농성 등의 싸움이 있었다. 이 시기 자퇴하는 운동권학생들도 일부 있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황인호(1986년 11월 선거에서 인문대학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으나, 학교당국이 총장실 점거사태의 책임을 물어 제명처분한다. 그해 12월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으로 고창후와 함께 구속된다.)다. 황인호는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정권의 나팔수 역할이나 하고, 진정한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대학을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며 자퇴했다.

김정열의 자퇴도 황인호의 '자퇴의 변'과 비슷하다. 자퇴를 한 그는 1988년 국민운동본부(1987년 7월 결성)에 합류해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제민협을 거쳐 1990년 한석씨와 함께 제주민주청년회를 설립해 사무국장으로 일한다.

▲ 1987년 4월3일 열린 제주대 써클연합회(회장 김정열) 발대식 모습.

제주민주청년단체협의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민주주의 민족통일 제주연합에서는 정책위원장을 맡아 일했고, 3년전부터는 느영나영 영농조합법인 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는 바쁜 생업 활동 속에서도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관련해, "6월항쟁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부담이 되었던 것은 내 얘기를 들어서 운동권에 들어온 후배들이 많다. 내가 어쨌든 학생운동 지도부였다는 것 때문에 계속 그러한 부담감이 작용하는 점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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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당시 제주대 학생운동권진영에서 소위 '언더'조직의 지도부 역할을 맡아 활동했던 정원태씨.

[정원태] 당시 제주대 사학과를 다녔던 정원태씨는 86학번이다. 86학번이면 6월항쟁이 있었던 1987년에는 2학년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언더진영의 지도부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운동권 진영내에서 '어른'역할을 하는 품성, 그리고 치열한 고민과 논쟁, 그 만의 철학적 소신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는 한양대 공대(재료공학과)에 다녔었다. 2학년까지 한양대에서 학생운동을 치열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양대 2학년을 마치는 학기에 그는 학교당국으로부터 '휴학권고'를 받게 되고, 결국 휴학하게 된다. 그리고는 군대(보충역)에 입대한 후 얼마없어 학교측으로부터 '퇴학 통지서'를 받게 된다. 이유는 시위와 관련하여 학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퇴학통지서를 받은 그는 담담했다.  당시 대학가의 분위기가 '학업전념' 보다는 시대적 암울함으로 인해 학생운동 또는 사회운동을 우선시하는 풍토였기 때문에 그 역시 대학이 아니라면 '사회운동'을 택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양대에서 퇴학당한 그는 군복무를 하면서 다시 학력고사(수학능력시험)를 준비하여 제대를 하던 해 제주대 사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가 다시 대입시험을 준비하는 1985년은 제주대학의 경우 학생운동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다시 대학에 입학하고자 했던 그의 뜻은 학생운동에 투신하고자 했던 이유가 강했던 것 같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입학한 후부터 그는 언더진영의 새로운 인물로 부각된다. 그리고 1학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는 제주대에서는 처음으로 언더출신인 현길호를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시키고, 선거와 관련한 제반 기획을 하는데 그가 중심으로 자리잡는다.

그 즈음 '옥중당선' '총장실 점거' 등 일련의 싸움 과정에서 그는 '1학년'이 아니라 '지도부'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고, 2학년이던 1987년에는 사실상 양대 패밀리에서 한축을 맡는 지도부로서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그 역시 6월항쟁과 1988년 통일투쟁 등을 마무리한 후 자퇴를 해버린다. 1988년은 총선이 열리던 해로 총선 직전 제주MBC의 방송사고(당시 운동권진영에서는 '개표조작사건'이라고 규정했음)와 관련해 싸움을 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받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조금 복잡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학생운동의 장 보다는 사회운동을 많이 생각했다."

대학을 자퇴하고 나온 그는 1989년에 농민운동에 합류한다. 고향인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수박농사를 지으며 농민회 창립 준비를 하게 되었고, 조천농민회를 탄생시킨다.
현재 제주감협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는 요즘 한미FTA 협상결과에 대한 그만의 분석데이터를 갖고 계속적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정원태씨는 "6월항쟁을 학생운동권 중심으로 그려내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항쟁의 주역은 시민이었다는 것이다. 그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제대로운 6월항쟁 평가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제대신문 1987년 7월10일자>


'民憲쟁취' 가두시위 벌여
중앙성당서 이틀간 철야농성 등 한때 경찰 충돌

지난달 21일부터 26일까지의 4일간 본교생들은 적게는 5백여명부터 2천여명이 시내 중앙로 등지의 중심가에서 '4.13 호헌조치 분쇄', '민주헌법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본교생들은 중앙로터리에서 시국대토론회를 벌였으며, 여기에는 시내 3개 대학 및 시민 1천여명이 참가하였다.
한편, 지난 22일에는 시내 중앙성당에서 1백여명이 철야 농성을 하고 23일에는 2천여명의 본교생 및 시민들이 시내 중앙로터리에서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려는 전경과 자정까지 투석전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히 시위하다 새벽 3시경에 해산하는 등 근래에 보기드문 가투를 전개하였다.
한편,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도민시국대토론회'가 지난달 10일 학생회관 앞 마당터에서 초청인사 및 재학생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는 진희종(서귀포시민, 전남대 제적)씨, 오만식(1985년 행정학과 졸)씨, 윤춘광(서귀포 민주청년회장)씨, 양영운(기독교장로회 제주청년연합회 부회장)씨, 오근수(기독교장로회 제주청년연합회 총무)씨 등이 초청연사로 참석하여 4.13 호헌조치 철회 및 현행헌법에 대한 개정 및 민주헌법 쟁취를 역설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가 끝나자 4백여명의 학생들은 '민주헌법 쟁취', '군부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수아파트까지 진출하다 전경과 대치하였다.
약 20여분간의 대치상태가 계속되자 전경들은 최루탄을 쏘며 해산을 시키려 하자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서다 교문내까지 후퇴하여 전경과 계속 투석전을 벌이다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했다.
<제대신문 1987년 7월10일자>

▲ <제대신문 보도사진, 1987년 7월10일자>


#제주대팀-중앙로팀, 남문로터리에서 대열 합류...시국토론회 개최

오후 4시50분께, 중앙로 시위대와 제주대 입구 시위대는 남문로터리에서 합류한다. 그러자 그 수는 1000명을 훨씬 넘긴다. 남문로터리에서 중앙로 일대 도로가 완전 점거되면서 차량통행이 막혔지만,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일부 시민은 박수로 지지를 보내고, 일부 시민은 음료수를 건네기도 했다.

김정열씨는 이 부분에서 남다른 감회를 피력한다.
"첫날 시위에서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것은 남문로터리에서 중앙로팀과 만났던 일,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정말 뭐라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 올랐어요. 4.3이후 처음으로 남문로터리에서 집회를 갖게 된 거예요. 결국 21일 대규모 가두집회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육지로 올라갔던 전경들이 결국 다시 제주도로 내려오게 되죠. "

박성룡씨는 "처음 시위가 시작될 때는 TV에서나 보던 모습을 처음으로 직접 보는 것이어서 신기한 듯 쳐다보기만 하다가, 구호와 성토가 점차 익숙해지니까 호응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싸움이 '승리하는 싸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대규모 인파가 집결된 남문로터리에서는 범도민시국대토론회가 열렸다.
범도민시국대토론회를 벌이고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독재타도' '비폭력 평화적 시위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청앞 민정당사까지 가두행진을 전개한 후 오후 6시50분경 광양로터리에서 자진 해산했다. 뒤늦게 타오른 제주의 6월항쟁은 이렇게 첫 밤을 맞고 있었다. 
<헤드라인제주>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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