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계기 '독재타도' '민주개헌' 열망 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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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계기 '독재타도' '민주개헌' 열망 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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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9] 박종철군 추모미사와 6.10 시국대토론회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보고자 합니다. <헤드라인제주>


[9] 박종철군 추모미사와 6.10 시국대토론회

제주에서의 6월항쟁은 일련의 정치상황과 그 맥을 같이한다. 말기로 접어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민주진영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그 어느때보다 옥죄어온다. 1986년 10월28일 건국대에서의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가한 학생들을 잔인한 폭력수단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은 애학투련 참가학생 1290명을 구속수감한다. 이 구속자수는 세계학생운동 사상 단일사건으로 최대 숫자였다.

이 애학투련 사건은 투쟁방식과 관련해 학생운동진영 내부에서도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된다. 전위조직의 선도적 투쟁방식은 대중에 기초하지 못하여 한계가 있으며, 대중들의 이해와 요구를 바탕으로 한 투쟁만이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각인된 것이다. 대중과 함께 하는 투쟁, 대중을 대상물로 볼 것이 아니라 함께 투쟁해야 할 동력으로 보는 시각도 이 시기 급격히 확산된다.

6월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에는 새해벽두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한다.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이 수사를 받다 물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경찰은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다.
고문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제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톨릭학생회, 박종철 군 고문규탄 시국성명 발표

제주에서는 2월5일 오후 7시30분 광양성당에서 추모미사(인권회복을 위한 미사-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추방을 위하여)가 있었다. 제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주최로 집전된 이날 미사에는 시민들은 물론 학생들도 대거 참석했다. 성당 마당 한켠에는 박종철군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마련됐다.

이날 미사에 발맞춰 제주교구 가톨릭 대학생연합회는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가톨릭대학생연합회는 시국성명을 통해 '살인적인 고문 용공조작 즉각 중단하라'. '불법적인 강제연행, 장기구금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민주투사 살인하는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 '민주투사 살인하는 모든 고문 수사기관을 해체하라'.'장기집권 획책하는 내각책임제 개헌 저지하자' 등 5개항의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입니까? 지금도 우리는 분노만 하고 한탄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한발 한발 다가서며 우리의 숨통을 옥죄이는 간악한 군사파쇼정권의 폭력앞에 좌절하거나 단순히 울분이나 분노만을 토로해서는 안됩니다. 독재정권을 이땅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올바른 투쟁의 대열에 우리의 힘을 결집할 때입니다.(중략)"
 

▲ 천주교 제주교구 가톨릭학생회연합회에서 제작한 군사독재정권 규탄 유인물. 이 유인물은 당시 연합회장을 맡아 활동한 박성룡씨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유인물을 작성한 장본인은 박성룡씨(당시 천주교 제주교구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 현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다. 81학번으로 1985년 복학한 그는 1986년 제주대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맡고, 이듬해인 1987년에는 대학생연합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가톨릭학생회 소속 대학생들의 경우 시국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그 때 당시 해방신학 노동신학 쪽으로 접근해서 성경해석을 그 쪽, 그러니까 사회참여쪽으로 해서 공부도 많이 하고, 후배들에게 공부도 많이 시켰구요."

유인물은 '가리방 긁기'가 아니라 '타자원지'에 타자로 쳐서 '회전식 등사기'에 돌려서 뽑아내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당일 추모미사에 참여한 인사와 학생들에게 이 유인물이 전해졌다.

박성룡은 이 유인물 배포와 박종철 군 추모미사 등의 문제로 경찰의 표적이 된다. 그는 추모미사가 끝난 후, 광양성당 사제관에서 5-6일 정도 은신한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신민당에서 제작한 고 박종철군 추모행사 팜플렛

신민당에서는 제주시 고한준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2월7일 오후 2시 고 박종철군 추모식을 가졌다. 신민당은 '도민여러분 다함께 참여합시다'라는 자필 유인물을 통하여 이날 오후 2시 '검은색 리본 또는 흰색 상장을 패용합시다'.'모든 교회, 사찰 등 종교기관에서는 동시 타종합시다' '모든 자동차는 추도 경적을 울립시다'.'모든 시민은 제자리에서 1분간 추도 묵념을 드립시다' 등 4개항을 당부했다.
박종철군 치사사건과 관련하여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이 시내에 대거 배포됐다. 이 유인물은 학생운동 소그룹 진영에서 '가리방 긁기' 방식의 등사기로 만들어져 집집마다 몰래 뿌려졌다.

유인물 배포작업은 대부분 학습소그룹인 '언더'조직을 중심으로 해 이뤄졌다. 보통 3-4명이 한 조를 이뤄 유인물 제작과 배포작업이 이뤄졌는데, 보통 자취방이나 빈방을 비밀아지트로 잡고 유인물에 쓸 내용의 초안을 잡은 후 가리방을 긁기 시작했다. 배포시간은 보통 새벽시간대. 점퍼 안 호주머니에 유인물을 담은 후 각자가 맡은 구역으로 이동해 유인물 한장 한장을 대문에 끼워넣는 작업이었다.

86학번의 한 인사의 회상이다.
"그 당시 피셀(유인물 살포작업을 뜻하는 운동권진영의 은어)이 있게되면 전날밤 자취방에 모인다. 동기들끼리는 대충 누가 참여하는지 알지만 지도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유인물을 다 만들면 배포작업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몇시간이 남는데, 그 때까지 잠을 안자기 위해 과자 한 봉지에 소주를 사다놓고 술을 마시며 토론을 하기도 했다."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정치가 극에 달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솟구치고 있던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특별담화를 통해 현행 헌법에 따라 차기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이 4.13호헌조치는 국민적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각계각층에서 4.13호헌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이 줄을 잇고, 학생들의 시위도 격렬해진다.

이 무렵 제주에서는 4.3대자보 사건으로 4월 한달내내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나면서 '연행학생 석방'과 '학원자율 쟁취'를 목표로 했던 학생운동진영은 '4.13호헌철폐' 등 정치적 연결노력을 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의 대단위 참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서 '대중투쟁'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공개'진영과 학습소그룹인 '언더' 진영간의 갈등은 더욱 불거진다. 또한 '언더'내부에서도 소그룹간 갈등이 생겨난다. 육지부에서의 '자민투'와 '민민투'와 같은 직접적 갈등대립은 아니었지만, 제주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도 조직이 커짐에 따라 미묘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었다.

#'언더'와 '공개' 진영 갈등 등으로 5월 싸움은 다소 주춤

1987년 5월18일 열린 제7주 광주항쟁 추모제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축소은폐와 4.13호헌조치 등과 적절하게 연계시켜 내지 못하고, 소단위 집회로 치러졌다.

5월18일 오후 2시 제주대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열린 '광주사태 제7주 추모제'(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운동권진영 역시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썼다.)에는 학생 100여명이 참가했다. 한달전 90%가 넘는 학생들이 중간고사를 거부하고 집회에 참석했던 그 열기와 비교하면 극히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이와관련, 당시 '언더'진영에 있었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4월 대규모 집회 열기가 역량의 한계로 바르게 이끌지 못한 점도 있고, '공개'와 '언더'간의 갈등도 많았다. '언더'에서는 4월 대규모 집회 열기를 몰아 강력한 투쟁으로 나설 것을 학생회쪽에 많이 요구했는데, 이 부분에 있어 의견이 잘 맞지 않았다. 결국 5월 투쟁은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채 비공개 소그룹 중심의 행사를 치르게 되는 5월 행사에 대한 소그룹간의 이견은 투쟁과정에서 분열양상을 내보였고, 운동 주체들의 투쟁의지의 약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 <제주신문 1987년 5월19일자>
제주대생 교내시위
제주대생 1백여명은 18일 하오 2시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광주사태 제7주 추모제를 갖고 '호헌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인 뒤 하오 3시10분께 자진해산했다.
<제주신문 1987년 5월19일자>








#5.18 집회 도중 '투위 발족식'...언더 진영 내부갈등도 그대로 표출

1987년 5월18일 열렸던 5.18집회는 언더진영 내부의 갈등을 표면적으로 드러낸 대표적 사례다. 오후 2시 학생회관 앞에서 열린 이날 집회에는 운동권진영을 중심으로 100여명이 참석했다. 총학생회 주최의 5.18집회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 한 진영에서 '투위 발족식'을 갖는다. 그것도 집회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총학생회 간부가 들고 있던 마이크를 빼앗다시피 하며 투위발족식을 강행했다. 이에 상당수 참여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옥신각신하며 집회장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다가 1986년 싸움으로 조직이 크게 늘어나고, '싸움의 기술'은 단련되었지만 투쟁의 전술과 방향에 대해서는 언더진영 내부에서도 통일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분열상을 그대로 표출한 것이다.

한 86학번의 회고다.
"집회가 한창 열리고 있는데 명칭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일부 언더진영에서 투위발족식을 하겠다며 마이크를 빼앗아 버렸다. 그러자 투위발족식에 참여한 언더진영과 생각을 달리하는 다른 언더진영의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집회현장에서)모두 나오라'는 오더를 보냈고, 그래서 집회에 참여하고 있던 많은 학생들이 현장을 박차고 나가버리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 당시 2학년에 재학중이면서도 언더진영에서는 지도부 역할을 맡고 있었던 정원태씨(당시 사학과 2학년, 현 제주감협 근무)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1986년에서 1987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86년까지는 소그룹들이 산재해 있으면서 비슷한 소그룹끼리 교류하는 측면이 강했고, 1987년으로 넘어가면서 소위 언더라는 진영이 큰 덩어리로 뭉친다. 비슷한 소그룹과 소그룹을 통틀어 '패밀리'라고 불렀는데, 제주대학교 내부에는 크게 나누어 볼 때 2개 패밀리가 있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패밀리에서는 1986년 이후 싸움을 얘기할 때면 '대중투쟁'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다른 패밀리에서는 '선도투쟁'을 강조한다. 5.18 집회도중 마이크를 빼앗으면서 투위 발족식을 한 진영은 바로 '선도투쟁'을 주창하는 패밀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우리가 '대중투쟁'을 하자는 입장이기 때문에 1987년 학생회 조직에 5개 회장들을 내보내게 된다"며 "4월투쟁을 거치면서 5월싸움 방식을 놓고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선도적인 투쟁, 즉 투위를 만들어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 맞서 싸움이 나게 된다"고 말했다.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이러한 2개 패밀리간 내부갈등은 6월항쟁을 맞으면서 다시 전술적 통일을 보게 된다.

#고문 축소은폐 사실 폭로로 사제단 단식 돌입

한편 5월18일 오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사실이 폭로되면서 전국적으는 독재정권에 대한 규탄투쟁이 한층 가열된다.

제주에서는 천주교 제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의 홍충수 신부 등 12명이 18일 오후 11시부터 제주교구청 3층 회의실에서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간다.
이날 신부들은 오후 8시부터 제주중앙천주교회에서 '광주사태 7주기 추모미사 및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가진 뒤 국민의 인권과 국가의 민주회복을 위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단식장 앞에서는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소속 학생 100여명이 "직선개헌"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농성을 주도한 박성룡씨는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신부님에게 부탁드려서 5.18 추도미사를 중앙성당에서 올렸어요. 그 전날부터 중앙성당 마당에서 광주학살 사진전을 열었구요. 18일 저녁 추모미사가 끝난 후 신부님들은 단식기도에 들어가고, 우리들은 단식장 앞에서 농성을 했어요. 추모미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학생운동권 진영에서는 이미 다 '오더'가 내려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많이 왔어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의 단식은 6일만인 5월23일 저녁 해제된다. 사제단은 '단식을 끝내며'라는 성명을 통해 직선개헌 등 5개항의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 <제주신문 1987년 5월19일자>
천주교 제주교구 신부 12명 단식
천주교 제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 정의평화위원장 홍충수 신부 등 12명의 사제들이 18일 하오 11시부터 제주교구청 3층 회의실에서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이날 신부들은 하오 8시부터 제주중앙천주교회에서 광주사태 7주기 추모미사 및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가진 뒤 국민의 인권과 국가의 민주회복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한편 이날 하오 9시30분께 구국기도회가 끝난 후 천주교 제주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학생 1백여명은 1시간동안 중앙성당 앞뜰에서 "직선개헌"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벌이다 하오 10시30분께 자진 해산했다.
<제주신문 1987년 5월19일자>


천주교 제주사제단 6일만에 단식끝내
▲ <제주신문 1987년 5월25일자>

지난 18일부터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을 간구하는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던 천주교 제주교구 단식 사제단 12명이 6일만인 23일 하오 7시30분 단식을 해제했다.
이들 사제단은 '단식을 끝내며'라는 성명에서 자신들의 뜻이 충분히 전달됐다고 보고 단식기도를 마친다면서 직선개헌요구 등 5개항의 뜻을 밝혔다.
<제주신문 1987년 5월25일자>


#제주서도 6월10일 시국대토론회 개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은폐조작 되었다는 발표는 전두환 정권의 존립의 근저를 뒤흔들었다. 5월 27일 통일민주당과 민통련 등 모든 민주세력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었다. 국본은 전 국민적 항쟁을 준비해갔다. 국본이 민정당의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는 6월 10일을 기해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에 발맞춰 제주에서도 6월10일 집회가 열렸다.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도민 시국 대토론회'가 제주대 학생회관 앞 마당터에서 초청인사 및 재학생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것이다. 이 시국 대토론회는 국본의 국민대회에 맞춰 개최된 것이었다. 제주에서는 아직 '국본'이 결성되지 않은 관계로 시국대토론회는 총학생회(회장 송형관, 현 CBS 기자)가 주관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진희종씨(당시 전남대 제적생.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현재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와 오만식씨(1985년 행정학과 졸, 제6대 제주도의회 의원을 지냈다.), 윤춘광씨(당시 서귀포 민주청년회장), 양영운씨(당시 기독교장로회 제주청년연합회 부회장), 오근수씨(당시 기독교장로회 제주청년연합회 총무, 2006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등이 초청연사로 참석해 연설을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4.13 호헌조치 철회 및 현행헌법에 대한 개정 및 민주헌법 쟁취 당위성에 대해 성토했다.

당시 정치연설에 참여했던 윤춘광씨의 회상이다.

▲ 윤춘광씨.

"정치적인 학내집회에 일반인이 노출되면서 참여한 것은 처음었어요. 연설의 주내용은 독재타도였어요. 호헌철폐와 직선제 쟁취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독재타도에 나서자는 것이었죠. 그날 토론회가 끝난 후 정문으로 걸어나갈 수 없었어요. 경찰이 우리를 잡으려고 안달하니까, 대학 뒷산을 넘어서 5.16도로 방면으로 한참을 걸어갔어요. 5.16도로로 가다가 표선쪽으로 연결되는 곳에 당도해서야 버스를 타고 표선으로 우회해서 서귀포로 돌아갔어요. 당시 서귀포시 일호광장 부근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 이후 경찰이 계속 식당앞에 진을 쳤죠."

한편 토론회가 끝나자 4백여명의 학생들은 '민주헌법 쟁취', '군부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수아파트까지 진출하다 전경과 대치하였다.
약 20여분간의 대치상태가 계속되자 전경들은 최루탄을 쏘며 진압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이에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히 맞섰다.

전경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제주대 정문까지 밀고 들어왔다. 교문안으로 후퇴한 학생들은 저녁 6시까지 격렬한 싸움을 전개했다.

제대생 2백명 시위
제주대생 2백여명(경찰추산)은 10일 하오 '호헌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외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날 하오 3시15분부터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총학생회 주관으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축소조작규탄 및 4.13호헌철폐 민주개헌쟁취를 위한 범도민 시국대토론회를 가진 뒤 하오 5시30분 교문밖 3백여m 교수아파트 입구까지 진출, 경찰과 대치해 시위를 벌이다 하오 8시20분께 자진 해산했다.
<제주신문 1987년 6월11일자>


 

▲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친구의 부축을 받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DB>

제주에서의 이 6월10일 시국토론회는 6.29선언이 있기 직전까지의 대규모 항쟁을 위한 첫 시작이었다. 시국 대토론회를 통해 참가학생들은 호헌철폐와 민주헌법쟁취 당위성에 대한 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공감대는 기말시험을 며칠 앞둔 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군사정권의 계속된 폭정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으며, 민주헌법 쟁취를 통하여 이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시대적 양심'이 도서관에서 기말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마음 속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여기에 6월9일 연세대 집회에서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머리에 피를 흘리며 친구의 품에 안겨있는 이 사진 한장은 전 국민의 분노를 자극했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주에서 첫 대규모 가두시위가 이뤄진 6월21일은 성큼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헤드라인제주>
 


<가톨릭학생회 시위주도 박성룡씨, 그 이후는...>

81학번인 박성룡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1985년 복학, 1986년 제주대 가톨릭학생회장을 맡아 활동한다. 그리고 1987년 천주교 제주교구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을 맡아 제주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나서게 된다.

물론 그 당시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 써클연합회, 사회과학대학, 인문대학 등 5개 학생회가 운동권진영에서 포진하면서 이른바 '공개' 진영의 활동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여기에 지도부격인 학습소그룹 '언더' 진영도 확대 재생산하는 방법으로 조직을 늘리고 있었다.

가톨릭학생회는 표면상으로 보면 '공개'조직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공개'와 '언더'를 혼합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써클이라는 점, 구성원들 대부분이 노출되어 있는 점을 보면 '공개'로 분류할 수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학습소그룹을 운영하며 치열한 토론을 통해 실천을 모색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 박성룡씨. 그는 현재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을 맡아 일하고 있다.  
 
1987년 2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때 광양성당 추모미사를 이끌어내고, 군부파쇼정권을 강력히 규탄하는 유인물을 자체 제작해 뿌릴 수 있었던 것도 가톨릭학생회가 갖는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종전 군사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 대부분이 '민족민주학우 일동' 등의 명의를 사용한데 반해, 가톨릭학생회의 경우 정확히 소속단체의 명의를 공표하고 반독재 유인물을 작성한 것은 가톨릭대학생연합회의 '용기'이자, 박성룡씨가 주도한 써클의 당시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가톨릭학생회의 활동과 관련한 일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을 맡아 일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1987년 3월쯤이던가, 고창후 황인호 구속학생을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제주시내 다방에서 '구속양심수를 위한 일일찻집'을 하자고 결정해서 티켓을 팔고 그것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일일찻집 하는 전날쯤인가 안기부에서 압력이 들어가서 다방주인이 못하게 됐어요. 그런데 바로 그 다방 옆에 보니까 비슷한 다방이 하나 더 있더라구요. 그래서 급히 다방을 옮겨 일일찻집을 해서 돈을 모아 구속학생 면회를 다녀왔어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5.18 추모미사 등을 주도하면서 제주대 학생운동권의 핵심적 지도부 역할을 하게 된 그는 6월항쟁에서는 '언더'와 '공개' 진영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는다.

현재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을 맡아 일하고 있는 박성룡씨는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느끼는 감회를 묻는 질문에 대해 겸손해하면서도, 자그마한 바람을 피력했다.
"제가 6월항쟁 20주년에 대한 감회를 피력할 수 있는지, 그 당시 싸웠던 수많은 동지들 중 한명일 뿐입니다. 외람되게 제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린다면 그 당시 투쟁을 했던 한 사람으로서 이번 20주년이 주는 의미는 저뿐만이 아니라 남다르게 생각합니다. 그 때 싸움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 제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했을까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당시 투쟁했던 동지들, 그리고 투쟁에는 동참하지 못했지만 가슴 아파했던 도민들이 많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민주화의 과정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이번 20주년을 기회로 각자 반성도 하고, 앞으로 열심히 후손들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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