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에 나붙여진 '4.3대자보', 대규모 학생시위...중간고사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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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에 나붙여진 '4.3대자보', 대규모 학생시위...중간고사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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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8] '4.3대자보'사건과 대규모 학생집회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헤드라인제주>

▲ 제주대 학생들이 1987년 4월17일 비상학생총회를 열고 있다. <제대신문 보도사진>
[8] '4.3대자보'사건과 대규모 학생집회

1987년 4월3일 아침.

▲ 당시 대학가에 붙여진 '4.3대자보'.(다큐멘터리 <6월나무>에서 캡처>
제주대학교 본관 학생회관 건물 외벽을 비롯해 교내에 대자보들이 잇따라 나붙었다. '한라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으로 시작하는 제주대 총여학생회 명의의 대자보는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4.3에 대해 억눌렀던 감정을 서술하며 수많은 양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다른 대자보 역시 '4.3'에 대한 입장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이것이 바로 1987년 제주에서의 대규모 6월항쟁을 있게 한 대중운동의 분수령이자, 4.3진상규명의 변곡점으로 불리우는 이른바 '4.3대자보' 사건이다.

이 '4.3대자보'는 40년간 계속돼 온 강요된 침묵을 깨는 4.3진상규명운동의 대중화를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4.19혁명 이후 4.3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운동은 간헐적으로 이뤄져 왔으나, 그 누구도 소리높여 외치지 못했던 문제를 이 사건을 계기로 해 대중적 촉구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1978) 발간 이후 학생운동권 진영에서는 이 책을 비롯해  미국학자 존 메릴의 <제주도 반란>이나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등을 은밀히 복사해 읽으면서 4·3을 제주지역 운동의 '역사적 지주'로 삼을 정도로 내부에서는 4.3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공개적으로 성토하지는 못했다.

1986년 4월3일 제주대 총학생회가 당시 박희수 회장의 제안으로 4.3분향소

▲ 당시 대학가에 붙여진 '4.3대자보'.(다큐멘터리 <6월나무>에서 캡처>
를 설치한 사건에 이은, 1987년 '4.3대자보'는 4.3진상규명 역사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극소수에 의한 진상규명운동이 아니라 대중적 진상규명운동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제주대 학생회 차원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4.3대자보는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대자보는 며칠 없어 철거됐다. 그리고 4월15일 아침, 대자보를 붙인 제주대 총여학생회 송영란 회장과, 사회과학대학학생회 김병현 홍보부장은 경찰에 연행된다. 그러나 이것은 '4.3대자보'사건의 시초에 불과했다.

학생운동의 불모지라 불렸던 제주에서 이 사건으로 인해 수천명의 학생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시위에 참가하는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울 줄이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운동권 포진한 5개 학생기구서 '4.3대자보' 계획

당시 학생회 간부들을 대상으로 여러가지 상황을 취합한 결과, 4.3대자보는 당초 5개가 동시에 나붙을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자보를 부착할 당시 총학생회가 주도가 되지 못했던 것은 1986년 11월 무더기 제명사태로 총학생회장 선거를 1987년 3월 다시 실시해 아직 출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학생회는 4월 19일 출범식을 가졌다.

▲ 당시 대학가에 붙여진 '4.3대자보'.(다큐멘터리 <6월나무>에서 캡처>
4.3대자보 사건은 이러한 시점에서, 총학생회가 출범하기 직전 발생했다. 총학생회가 정식 출범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운동권 진영이 포진하고 있는 총학생회, 여학생회,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인문대 학생회, 써클연합회 등 5개 학생자치기구의 장들은 한데 모여 4월3일에 즈음한 행동방향을 논의하게 된다.

이들은 4.3이 다가오자 시위는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의견을 모으고, 대신 대자보를 붙이자고 합의한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써클연합회 발대식이라 써연에서는 그만 바빠 대자보를 준비하지 못한다(제주대학교 교지 <한라산>, 1992참조). 그래서 대자보는 4개만 부착되었던 것이다.

당시 총여학생회장인 송영란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총학생회는 출범하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여학생회 차원에서도 얘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논의가 모아져서 대자보를 작성해 부착하게 된 것이구요, 사과대는 사과대 자체적으로 나간 것으로 기억돼요."

▲ 당시 대학가에 붙여진 '4.3대자보'.(다큐멘터리 <6월나무>에서 캡처>
4.3대자보는 예상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일명 '고갈비패'라고 불리는 안기부(현 국정원)에서는 '언더'니 하면서 활동하는 이들을 잡아 조직사건을 터뜨리려고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조직표를 그려놓고는 그 표안에 사람 이름을 채워넣는 일만 남았다는 소문이 운동권진영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대자보 한장 나붙는 것은 요즘 같아서는 별 일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상당히 큰 파장으로 이어졌다. 학내에 경찰이 상주해 있는 상황이고, 대자보를 부착해도 눈치를 봐야 했고, 그런 행위자체가 불법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4.3문제를 공론화시키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대자보투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경찰은 이 대자보가 나붙자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상당히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자보가 나붙은지 10여일이 지나서야 관련자를 연행하기 시작한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일각에서는 당시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직후에 이뤄진 것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라는 의견을 펴기도 한다.

#연행된 송영란에게 경찰은 '태극기 그려보라'...

▲ 오영덕 감독의 다큐멘터리 <6월나무>에 현충열씨(당시 제주대 국문 3)와 함께 출연해 4.3대자보 부착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송영란씨(오른쪽).
4월15일 아침, 제주시 사라봉 오거리 근처에서 살고 있었던 송영란의 집에는 제주도경에서 나온 경찰 2명이 불쑥 찾아왔다. '뭣 좀 알아볼 것이 있으니 같이가자.'며 막무가내로 송영란을 도경으로 끌고 갔다. 같은 날 사회과학대 학생회 홍보부장인 김병현도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학생회 간부로 활동했던 한 인사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안기부와 경찰에서 '조직사건'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는데, 이 대자보가 붙자 밤이고 낮이고 학교에서 숙식하며 생활하는 학생회 회장들은 못잡아가고, 집에서 통학하는 여학생회장과 사과대 홍보부장은 잡아가 버린 것으로 생각했어요."

상당히 체구가 작고 가냘퍼 보였던 송영란은 제주도경 대공과로 연행된 후, 4.3대자보에 대한 혹독한 조사를 받게 된다. '4.3대자보를 작성하게 된 경위가 무엇이냐', '4.3에 대해 읽은 책이나 자료를 대라', '배후는 누구냐' 등등.

조사 과정에서 '태극기 그리기'는 학생운동권 진영에서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대공과 형사가 송영란을 상대로 취조하면서 백지에 태극기를 그려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송영란씨는 이 부분에 대한 물음에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경찰조사에서 대자보를 작성하게 된 경위, 혼자 했는지 아니면 누군가 시켜서 했는지 등을 모두 조사한 후 형사가 종이한장을 내밀더라구요. 태극기를 그려보라면서. 그래서 제가 펜으로 태극기를 그렸어요. 그랬더니 그 형사는 '태극문형에서 파랑이 위에냐, 아니면 빨간색이 위에냐' 하면서 시시콜콜하게 묻더라구요. 아마도 태극기도 못 그리는 '불온세력'으로 몰아부치려 한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학생들 분노 거세지고, 총장에게는 '쫄때기 총장' 꼬리표 붙여져

한편 4월15일 송영란과 김병현 두명의 학생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학생들은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5시께 학생회 간부들과 '언더' 진영 학생 30여명이 대학 학생과로 찾아가 경찰이 연행하게 된 경위를 해명하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사무실 유리창 등이 부서졌다.

그리고 이날 오후 6시에는 운영위원회가 학생처장과 면담하며 연행경위 해명과 전년(1986년 11월) 부당징계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날 밤 8시에는 운영위원 6명이 제주경찰서장과 면담했다. 그러나 연행학생에 대한 석방약속 등은 받아낼 수 없었다.

▲ 제주대 학생들이 송영란 총여학생회장 등을 경찰이 연행해 간 것에 항의하며 본관 총장실 입구에서 항의농성을 하고 있다. 계단 위에서는 교직원들이 나와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다. <제대신문 당시 보도사진>
이에 분노한 총학생회와 써클연합회, 단과대학학생회는 4월16일 오후 1시 학생회관 앞에서 총학생회 주최로 2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4.19 민주혁명 계승대회'를 갖고 "연행학생 석방하라" "학원자율 쟁취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날 행사는 4.19기념식에 이어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성토대회 순으로 진행됐다. 오후 3시에는 학생들이 본관 앞으로 몰려가 연행경위 해명과 조속한 석방을 촉구했다.

이에 김두희 총장은 "연행학생의 보안법위반 여부는 불확인됐으나 인권적 측면에서 법에 저촉되더라도 학생신분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조속히 석방시켜 주도록 이미 요청했다"고 답했다.

학생들이 1986년 11월 총장실 점거사건과 관련해 7명의 학생에 대해 취해진 제명조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자, 김두희 총장은 지난해 총장실 점거로 인한 징계처리는 불가피했음을 설명한 후, "면학의지가 있는 일부학생에 대해서는 문교당국에 건의해 면학기회를 부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당시 학생운동권 진영이 김두희 총장에 대해 '쫄때기 총장'이라고 불리게 된 연유에 대해 전해진다. 김두희 총장은 학생들이 연행학생 석방과 기관원 상주금지를 요구하자, "나같은 쫄때기가 무슨 힘이 있느냐."는 말을 여러차례에 걸쳐 반복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김 총장에게는 '쫄때기 총장'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김두희 총장으로부터 원론적 답변만 전해들은 학생들은 이날 오후 7시께 운영위원회 회의를 열고 이 문제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연행학생 석방과 부당징계철회를 위해 중간고사를 거부하자는 안이 제시된다.

운영위원회는 중간고사 거부안을 비상학생총회에서 결정키로 하고 4월17일 오후 1시 비상학생총회를 갖기로 한다.

#첫 비상학생총회 수천명 집결...중간시험 거부 결의

4월17일 아침, 총학생회 간부들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교문앞에서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학생들에게 긴급히 알렸다. 김성대 총무부장과 이법정 기획부장 등 총학생회 집행부들은 비상학생총회 개최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교문 앞 선전전을 펼쳤다.

이날 아침에는 학생들에게 경찰의 부당연행을 규탄함과 동시에 비상학생총회에 참석해줄 것을 호소하는 유인물도 배포됐다. 그것도 하늘높이 유인물을 무더기로 뿌려대는 것이 아니라 한장 한장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

▲ 제주대 학생들이 중간시험을 거부하고 '학원자율 쟁취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내시위를 벌이고 있다. <제대신문 보도사진>
종전 시국과 관련한 문제의 유인물인 '피셀(유인물 살포, 운동권 진영에서 페이퍼의 약자를 따서 부르던 은어)'은 철저히 비공개로 이뤄졌다. 학내에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인물을 배포하는 학생의 신분이 노출될 경우 경찰의 타깃이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일했던 김성대씨의 말이다.
"4.3대자보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유인물은 물론 대자보까지도 신분을 노출하며 붙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철저히 비밀리에 이뤄졌어요.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해 유인물 배포가 공개적으로 이뤄졌고, 그 때부터는 또 매일같이 이러한 일이 이뤄지면서 집회나 시위가 있을 때면 으례히 유인물이 공개적으로 배포되기 시작했죠."

오후 1시, 제1차 비상학생총회에는 500여명(제대신문 보도내용)의 학생들이 몰린다. 그러나 이날 참석했던 인사들에 따르면 실제 참여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은 최소 1000명으로 추산했다.

비상학생총회에서는 4월20일부터 예정돼 있던 중간시험을 거부하기로 결의를 모은다. 또 이에따른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비상학생총회의 결정사항을 토대로 이날 저녁 6시께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비대위는 학원민주화와 자율화 투쟁을 위해 중간고사를 거부하는 것을 강행할 것을 재차 결의한다.


▲ <제대신문 1985년 5월13일자>
27주기 4.19혁명 계승대회
학원자율화, 징계철회 성토대회도 가져
제27주기 4.19민주혁명계승대회가 총학생회 주최로 지난달 16일 학생회관 앞 마당터에서 1백5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오후 1시부터 2시간 반동안 개최됐다.
이날 행사는 4.19기념식에 이어 지난 15일 4.3대자보건으로 연행된 여학생회장 송영란(일문 3)양과 사과대 홍보부장 김병현(법 3)군 석방과 부당징계 철회, 학원자율과 민주화를 주장하며 1시간반동안 성토대회를 가졌다.
오후 3시경 본관앞에서 연행학생 석방요구에 김두희 총장은 "연행학생이 보안법위반여부는 불확인됐으나 인권적 측면에서 법에 저촉되더라도 학생신분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조속히 석방시켜주도록 이미 요청했다"고 밝혔으며 "지난해 총장실 점거로 인한 징계처리는 학원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불가피했음을 설명한 후 면학의지가 있는 일부학생에 대해서는 문교당국에 건의, 면학기회를 부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편 총학생회 주최 4.19혁명계술 학술세미나가 지난 4월15일 1시 학생회관 앞 마당터에서 1백여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라는 주제아래 열린 이번 세미나는 김근용(농화학 3)군의 발표로 4.19의 민족운동사, 4.19자체의 양상분석에 관한 내용으로 약 1시간동안 진행됐다.
<제대신문 1987년 5월13일자>


#대규모 시위에 연행학생 곧바로 석방...송영란의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에 울음바다

예상외로 많은 학생들의 참여 속에 중간시험 거부와 대규모 시위조짐을 보이자 학교당국과 경찰당국도 순간 긴장한 듯 하다. 경찰은 비대위 결의가 모아진 후 3시간 후인 밤 9시께 연행됐던 송영란과 김병현을 모두 석방한다.

송영란과 김병현의 석방은 경찰이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조짐에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공권력에 의해 억눌러온 4.3문제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해 대중적 논의로 확산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 오영덕 감독의 6월항쟁 다큐멘터리 <6월나무>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김성대씨.
김성대 당시 총무부장은 이렇게 회상한다.
"사실 그 당시 시대적 분위기로는 4.3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입장을 내는 일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만큼, 송영란과 김병현은 국가보안법을 적용받아 구속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틀만에 모두 석방된 거에요. 쉽게 석방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 싸움을 준비해왔는데, 전술상 방향선회가 불가피해졌어요."

중간시험 거부를 결의한 날 공교롭게도 연행학생이 석방되면서 학생회 입장에서는 사실 걱정거리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이미 결의된 '중간시험 거부'투쟁을 학생들이 잘 따라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연행학생이 석방된 다음날은 토요일인 4월18일이었다.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오후 2시 열린 제2차 비상학생총회에는 전날보다 많은 인파가 몰렸다. 주최측에서는 최소 3000명이라고 했고, 제대신문은 1000명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극소수 '인자(운동권진영에서 소위 '언더'에서 정통적으로 학습으로 이념무장이 이뤄진 학생을 일컬어 부르던 은어)' 중심의 싸움에서 탈피하지 못했던 제주대 학생운동이 완연한 대중적 투쟁의 희망을 보게 된 것이다.

비록 연행학생은 석방되었지만, 그날 집회에서 참석한 수천명의 학생들이 한 마음으로 결의를 다지는 값진 성과를 얻게 된다. 바로 감금됐다 풀려난 송영란 여학생회장의 '눈물의 성토' 때문이다.

송영란 회장은 학생들 앞에 나서, 4.3대자보를 붙여야 했던 이유, 그리고 경찰에 연행된 후에도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믿었다는 신념 등을 내보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송영란은 "경찰에 감금돼 있으면서 이 노래를 마음 속으로 부르면서 힘든 것을 이겨냈다"며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를 불렀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눈물로 이 노래를 부르자, 학생들도 모두 따라 불렀고, 집회장에 모인 수천명의 학생들은 저마다 눈시울을 적셨다.
김성대씨는 이 때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날 2차 비상학생총회는 제가 사회를 봤어요. 내 기억으로는 어림잡아 2000명은 족히 넘었던 것 같아요. 토요일인 점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이 모인 것이죠. 송영란씨가 성토시간에 나와서, 잡혀갔을 때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하고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집회에 참석한 많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렸어요. 그 자리에서는 (중간시험 거부 등에 대해)이견이 없었어요."

이러한 감성적 분위기가 작용한 때문일까. 집행부에서 우려한 학생들의 이탈은 없었다. 단 한명의 반대없이 예정대로 중간시험 거부를 강행하기로 결의가 재차 모아졌다. 이후 싸움은 '지명수배 철회'와 '학원탄압 중지', 그리고 '학원자율화'로 가져나가기로 결의가 된 것이다.

이에 학교당국은 매우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두희 총장은 다음날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전 교직원들을 2동 중강당으로 불러모아놓고 전체교수회의를 열고 중간고사를 강행할 것을 결의했다.

교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중간고사를 예정대로 실시하겠다고 결의를 모으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학생들은 시험을 안보겠다고 하고, 교수들은 시험 치르는 것을 강행하겠다고 결의하고, 대학은 급속도로 혼란에 빠졌다.

▲ 당시 4.3대자보가 붙여졌던 제주대 학생회관 건물 외벽. 지금은 파란색 페인트로 곱게 단장돼 있다.

#중간시험 거부에 92% 동참...교수들은 '시험강행' 결의

결국 시험을 거부하기로 한 가운데, 중간시험 첫날인 4월20일 낮 12시께 시험거부투쟁 제1차 경과보고대회가 열렸다. 이날 제1차 경과보고대회에는 7개 단과대학 48개 학과 중 47개 학과에서 참여했다. 사실상 완전한 시험거부를 강행한 것이다. 경과보고에 참석한 학생만 당시 대학 전체학생(6000여명)의 절반을 넘는 3000여명으로 추산됐다.

제주신문은 1987년 4월21일자 사회면 기사에서, "제주대학교 학생 3천여명은 20일 부당징계 철회 등을 요구하며 87학년도 제1학기 중간시험을 거부, 하오 4시까지 교내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제주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날 학생들은 8교시까지 대상인원 6377명 중 510명만이 시험을 치러 8%의 저조한 응시율을 보였다.

즉, 92%가 중간시험을 거부하고 학원자율화투쟁에 합류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된 듯, 20일 제1차 경과보고대회는 학교당국과 경찰을 규탄하는 구호소리가 매우 크게 울려퍼졌다.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오후 4시까지 교내를 돌며 부당징계(1986년 제명조치) 철회 등을 요구했다.

써클연합회(회장 김정열)는 중간시험 기간에 '아라민주대학'을 열어 정치선전 활동을 벌였다.

중간시험 이틀째인 21일에도 수천명의 학생들이 집회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제2차 경과보고대회에는 학생 2000여명이 참석해 보고대회를 마친 후 교내를 돌며 시위를 벌였다.

22일 열린 제3차 경과보고대회에도 학생 1000명이 모였다. 이에 잔뜩 긴장한 학교당국은 학생과의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게 된다. 22일 밤 9시께 비대위 소속 학생들이 김두희 총장과 면담을 한다. 이 자리에서 비대위는 1986년 11월 제명조치된 학생들에 대한 징계를 철회해줄 것을 요구했고, 김두희 총장은 원론적인 답변만 하면서 협상은 결렬된다.

이에 23일 오후 2시 학생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제4차 경과보고대회를 가진 총학생회는 오후 5시30분께 '학원자율 쟁취' '부당징계 철회' '지명수배철회' 등을 주장하며 총장실을 점거하고 철야농성에 돌입한다. 이 때 총장실 점거에 참여한 학생은 140여명 정도.

당시 총장실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본관 2층 총장실 앞으로 몰려갔으나 굳게 닫힌 문 때문에 진입할 수가 없었다. 총장실 점거가 무산되는가 했더니, 어느 학생이 '총장실 밖 유리창문이 잠겨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김성대 총무부장이 사다리를 준비하고 와 본관 앞 방향에서 사다리를 타고 총장실 유리창문을 열고 내부로 진입했다. 이법정 기획부장도 뒤따라 총장실로 들어갔다. 총장실 내부로 들어온 이들은 총장실 출입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복도에 서있던 학생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면서 철야농성은 시작됐다.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학교당국은 학생.교수.학교측 대표 각 2인으로 수습위원회 구성안에 동의하며 사태수습방안 모색에 나선다. 그리고 4월25일 수습위원회는 부당징계철회와 후속 복교방안 및 시험거부에 따른 사후대책안에 대해 타협을 본다. 수습위원회의 타협에 따라 총장실 점거 철야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은 3월25일 오전 11시40분께 농성을 풀고 해산해 4.3대자보 부착으로 시작됐던 일련의 싸움은 일단 마무리된다.

제주대학교 학생 3천여명은 20일 부당징계철회 등을 요구하며 87학년도 제1학기 중간시험을 거부, 하오 4시까지 교내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학생들은 8교시까지 대상인원 6천3백77명 중 5백10명이 시험을 치러 8%의 저조한 응시율을 보였다.
<제주신문 1987년 4월21일자> 



 

▲ <제주신문 1987년 4월24일자>
총장실 점거 이틀째 농성
제대생 1백여명

제주대생 1백여명은 23일 하오 5시27분께 총장실을 점거, 학생부당징계 철회 등 4개사항을 요구하며 철야농성, 24일 낮 12시 현재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학생들은 23일 교내시위를 끝낸 뒤 하오 3시10분부터 본관 현관 앞에서 김두희 총장을 면담, 총장으로부터 요구사항에 대한 답변을 듣고 이에 대응, 4시20분께 본관 2층 복도에 진입해 농성을 벌이다가 총학생회 기획부장 이법정군(해양학과 3년)이 사다리를 이용, 창문으로 총장실 안으로 들어가 잠겨져 있던 출입문을 열고 총장실을 점거했다.
김두희 총장은 이날 5백여명의 학생 앞에서 언약됐던 2명의 학생사건은 종결됐고, 2명의 수배학생은 경찰이 수배한 바 없음을 확인했으며 부당징계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징계해제를 검토하고 시험거부 학생에 대해서는 전체교수회의를 열어 선처를 당부하겠다는 학교측 입장을 40분간 설명, 학생들을 설득했다.
중간시험 4일째인 23일에는 총대상학생 6천19명 중 13.3%인 8백1명만이 응시, 나머지 학생은 시험을 거부했다.
<제주신문 1987년 4월24일자>

▲ <제주신문 1987년 4월25일자>
제대생 70여명 농성풀고 해산
지난 23일 하오 학낸문제로 총장실을 점거, 농성을 벌였던 제주대생 70여명은 25일 상오 11시40분께 학생요구에 대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학교측의 설득에 따라 농성을 풀고 자진 해산했다.
한편 이날 제주대 학생 총대의원회에서는 상오 11시 총회를 열고 학원정상화 수호를 결의했다.
또 교수들도 이날 상오 11시30분 사회과학대학 중강당에서 전체교수회의를 갖고 학원정상화와 교권확립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제주신문 1987년 4월25일자>

▲ <제대신문 1987년 5월13일자>
주요사건일지
다음은 제대신문이 지난 4월15일부터 25일까지 전개된 학원자율화 쟁취를 위한 중간고사 거부와 간련된 일련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4월15일(수)
-오후 5시경 : 학생 30여명 4.3사건 대자보관련 여학생회장.사과대 홍보부장 경찰연행 해명요구하며 학생과 유리창 등 기물파손
-오후 6시경 : 운영위원회 학생처장과 면담 연행해명.작년 부당징계 철회 요구
-오후 8시경 : 운영위원 6명 제주경찰서장과 연행학생문제 면담
▲4월16일(목)
-오후 1시경 : 총학생회 주최 4.19민주혁명계승대회 '연행학생 석방' '부당징계 철회' '학원자율쟁취' 주장 학생 2백여명 농성
-오후 3시경 : 학생 2백여명이 총장과 본관 앞에서 면담갖고 총장의 사태해결 노력 언약받음
-오후 7시경 : 운영위원회에서 '연행학생 석방' '총학생회장.사과대학생회장 지명수배령 철회' '부당징계철회' 요구관철 위해 중간고사 거부안 제시됨
▲4월17일(금)
-오후 1시경 : 제1차 비상학생총회 학생 5백여명 참석, 중간고사 거부결의, 중간고사 거부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오후 6시경 : 비대위 학원민주화, 자율화투쟁 위한 중간고사 거부 강행 결의
-오후 9시경 : 연행학생 석방됨
▲4월18일(토)
-오후 2시 : 제2차 비상학생총회 학생 1천여명 참석 학원자율화투쟁 경과보고대회 가짐 '연행학생 완전석방 공식문서화 제출' '지명수배 철회' '부당징계 철회' '학원탄압 중지'요구 농성
▲4월19일(일)
-오후 6시30분경 : 중강당에서 전체교수회의 열어 중간고사 강행결의
▲4월20일(월)
-낮 12시경 : 시험거부투쟁 제1차경과보고대회 학생 3천여명 참석 교내시위, 7개 단대 전 48개 학과 중 47개학과 시험거부 돌입, 아라민주대학 개설
▲4월21일(화)
-오후 2시경 : 제2차 경과보고대회 학생 2천여명 교내시위
▲4월22일(수)
-오후 2시경 : 제3차경과보고대회 학생 1천명 교내시위
-오후 9시경 : 비대위 총장과 면담, 16일 총장의 언약 재확인 구체화 방안논의 의견차로 타협결렬
▲4월23일(목)
-오후 2시경 : 제4차 경과보고대회 학생 5백여명 교내시위
-오후 5시30분경 : '학원자율쟁취' '부당징계철회' '지명수배철회' 주장하며 학생 140여명 총장실 점거 철야농성 돌입
▲4월24일(금)
-오후 7시경 : 학생.교수.학교측 대표 각 2인으로 수습위원회 구성 타협안 모색
▲4월25일(토)
-새벽 3시경 : 수습위원회 부당징계 철회와 후속 복교 방안 및 시험거부 사후대책 타협봄
-오전 11시40분경 : 총장실 점거.철야농성 풀며 해산
<제대신문 1987년 5월13일자>


당시 상황에 대한 김성대씨(현 청와대 행정관)의 얘기다.
"서로(학교측과 학생)의 이해가 맞았다고 생각한다. 농성을 장기적으로 가져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학교측에서도 농성을 풀 수 있도록 적절한 명분을 줬고, 학생 입장에서도 그 정도 명분이면 농성을 풀어도 되겠다고 생각했구요. 무엇보다 일련의 상황에서 연일 대규모 집회와 대단위적인 중간시험 거부싸움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는데서 성과를 챙기고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 상황에 있었던 거죠."

이 과정에서 일부 학내갈등의 요소도 있었다. 제대신문은 1987년 5월13일자 <기자방담>을 통해 중간고사 거부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집회나 농성 등의 결정과 계획이 성급하게 이뤄진 점이 아쉽다고 평했다.

운동권진영에서도 이 일련의 상황이 마무리될 즈음에 다양한 의견이 표출된다. 이른바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공개'진영과 학습소그룹의 '언더' 진영간의 갈등이다. 언더진영에서는 쉽게 싸움을 마무리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약한 명분을 갖고 싸움을 마무리해서는 안되고, 보다 강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언더'쪽의 입장이었다.
이에반해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공개' 진영에서는 곧이어 5.18 등 5월 집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이 싸움을 계속 끌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공개' 진영의 입장대로 싸움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공개'와 '언더' 진영간의 미묘한 내부 갈등은 계속된다.

#제주 민주화운동사에 커다란 성과와 함께 의미있는 사건으로 평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4월 '4.3대자보'를 시발로 한 중간고사 거부투쟁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사에 커다란 성과와 함께 의미있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첫번째, 학생운동권이 주도한 집회 및 시위에서 수천명 단위의 대규모 투쟁을 일궈낸 것은 두달 후 6월항쟁의 대규모 투쟁을 일굴 수 있었던 역량강화의 발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집회를 한발 물러서 지켜봤던 당시 한 학외인사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제주에서 그동안 시위라고 해봐야 고작 몇백명 모이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인자' 중심의 싸움이었다.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있기는 했으나 폭넓은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4.3대자보 사건을 계기로 한 4월싸움은 양상이 달랐다. 일반 학생들의 전폭적인 참여가 있었다. 학생운동의 역사가 짧은 제주에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서울에서도 3천명 이상 모이는 집회가 어려운 상황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제주대에서 수천명 단위 집회와 시위는 6월의 '대중적 시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대규모 단위 집회를 일궜다는 성과와 함께, 두번째는 40년간 억눌러왔던 4.3문제가 한 순간에 폭발해 '대중적 진상규명' 촉구운동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는 점이다.

"왜 경찰은 왜 그들을 빨리 풀어줬는가. 이는 4.3문제가 지역에서 정치적 쟁점으로 확산되는 것을 조기 진화하기 위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집회에서 왜 그렇게 많은 학생이 모였는가. 서울의 메이저 대학에서도 4-5천명은 안 모인다. 학생운동의 역사가 짧고 한 여학생의 연행에 대해서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바로 '4.3'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6월항쟁 이후 4.3 진상규명이 대중화 될 수 있었던 것이다. 4.3진상규명이 공론화되는 것을 정권은 가장 두려워했다. 송영란 회장이 풀려난 후, 집회에 참가해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를 부를 때 모든 학생들이 같이 눈물 흘리며 그 노래를 불렀다.  잘 알지도, 잘 듣지도 못했지만 4.3의 혹독한 시련, 4.3진실규명에 대한 열망이 선험적으로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제주 민주화운동 모 인사)

또다른 인사는 "이 사건은 어쩌면 제주 현대사에 주체성, 자기정체성, 역사의 정체성을 찾는 '제주현대사의 변곡점'으로 평가될만하고, 그리고 '4.3 대중화의 계기'라고 부를 정도로 대단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어쨌든 이 4월싸움은 4.3진상규명의 대중적운동의 계기가 됨과 동시에, 대규모 투쟁을 일궈낼 수 있는 자신감을 갖는 전환점이 된다.

세번째, 이 사건을 계기로 해 학내에 상주해 있던 기관원들이 학내상주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학내에 대자보 조차 자유롭게 붙이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상주 기관원 때문이었다. 총장실 옆 '소회의실'에 살림을 차렸던 기관원들은 학내에 나붙는 대자보는 물론 유인물에 대해 사찰하고 행위자를 색출해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기관원들이 학내에서 내몰리게 된다. 그러면서 학내에 대자보가 연이어 나붙었고, 그동안 몰래 살포되던 유인물은 학내에서만큼은 공개적으로 배포되기 시작한다.

4.3대자보로 촉발된 4월싸움은 제주의 6월 대항쟁을 예고하고 있었다.<헤드라인제주>

<4.3대자보 사건, 그 이후는...>

   
 
  ▲ 1987년 발행된 제주대 총여학생회의 회보지 <아라여성>  
 
"1987년 3월13일 '하늘의 절반을 쟁취하자'라는 구호아래 제3대 여학생회가 발대식을 가졌다. 신입생 환영회를 겸한 이날은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올해의 제주대학을 이끌어갈 자치기구 중 가장 먼저 발대식을 가짐과 아울러 하나의 행사를 치러냈다. ...중략... 시대의 아픔, 거꾸로 된 사회의 모순 등 제반문제에 대해 지적을 하면서 앞으로 여학생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거짓말이 세상을 흔들고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과연 우리네 학생들은 어떠한 위치에서 어떠한 모습에 서 있는가. 생존권조차 빼앗기고 인간의 존엄성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현실에서 지성이기를 자부하는 우리네 지성인들은 우리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진실로 답할 자 몇이나 될까.
어둡고 우울한 이 시대에 그저 침묵으로 방관만 하기엔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우리'라는 공동체적 삶 속에서 우리의 여성들은 지금껏 살아온 사회에서 떨쳐 일어서야 한다.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제주대학교 여학생회보 2호)

4.3대자보 사건의 주역인 당시 총여학생회장 송영란씨가 1987년 3월 여학생회 발대식을 하면서 낭독한 인사말이다. 그는 1989년 2월 졸업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무역회사와 전자회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994년 결혼해 지금은 두 딸의 엄마로, 전업주부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최근 오영덕 감독이 제작한 6월항쟁 다큐멘터리 '6월나무'에서도 현충열씨와 함께 4.3대자보 사건에 피력했다.

'하늘의 절반을 쟁취하자!'는 청년시절의 외침처럼, 전업주부인 그에게서는 언제나 '작지만 강한 열정'이 느껴진다.

▲ 1987년 4.3대자보 사건의 주역이었던 송영란씨. 그는 현재 서울에서 두 딸의 엄마로, 전업주부로 생활하고 있다.
서울에서 이메일을 통해 짧은 인터뷰를 한 송영란씨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이를 자부하기 보다는 미안한 마음을 피력했다.

"사실, 20여년이 지난 지금 하나의 얘깃거리가 된다는 자체가 제게는 큰 부담이었고, 제주를 떠나 살아온 세월이 길어 1987년 저를 기억하는 선배와 후배, 뜻을 같이했던 친구들에게는 그저 미안함으로 낯을 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6월항쟁의 동력과 관련해서도, "6월항쟁다큐 촬영을 위한 인터뷰에서도 말했듯이 민주화를 향한 도민들의 열정과 희망이 있었기에 그날 6월의 함성은제주의 온 땅을 덮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주민주화운동사에 대한 첫 조명이라고 할 수 있는 <타는 목마름에서>에서 4.3대자보 사건을 집중 조명할 예정이라고 밝히자, 그는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
"그 소식을 듣고 옛 일들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사실 제게 처음 닥친 외적인 시련이었고 이를 계기로 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내가 아닌 우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송영란씨는 "<타는 목마름으로> 기사를 읽으면서 늘 그 자리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여러 선배들, 친구들, 후배들이 있는데 감히 제가 그날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이름이 올려지는 것이 제게는 두려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20여년전의 학생운동사를 다시 쓰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아붓고 계시는 헤드라인제주의 열정과 노고에 머리숙여 감사드린다"며 "그때도 지금도 87년(4.3대자보건, 6월민주항쟁)의 주인공은 진실의 힘을 믿었던 모든 제대학우들과 제주도민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고 피력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 <제주신문 1987년 4월23일자>

제대 중간시험 응시율 9.7%
제주대생 5천7백여명은 중간시험 3일째인 22일에도 계속 시험을 거부했으며 5백여명의 학생들은 총장퇴진 부당징계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험에는 총대상 학생 6천3백77명 중 9.7%인 10% 미만의 저조한 응시율을 보였다.
한편 학교측은 계속되는 시험거부에도 불구, 시험실시를 강행할 방침이다.
<제주신문 1987년 4월23일자>

제주대생 5천7백여명은 중간시험 3일째인 22일에도 계속 시험을 거부했으며 5백여명의 학생들은 총장퇴진 부당징계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이날 시험에는 총대상 학생 6천3백77명 중 9.7%인 10% 미만의 저조한 응시율을 보였다.한편 학교측은 계속되는 시험거부에도 불구, 시험실시를 강행할 방침이다.<제주신문 1987년 4월23일자>

▲ <제주신문 1987년 4월21일자>
제주대생 시험거부

 

제주대생 시험거부 계속

▲ <제주신문 1987년 4월22일자>

제주대생 5천7백여명은 20일에 이어 21일에도 학기 중간시험을 거부했다.
제주대에서는 이날 중간고사 총응시대상자 6천3백77명 가운데 9%인 5백74명만이 시험을 보고 나머지 5천8백3명이 시험을 거부했는데 20일의 응시율 8%에 비해서는 다소 높았다.
<제주신문 1987년 4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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