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던져야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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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던져야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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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6] 1986년 12월,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보고자 합니다. <헤드라인제주>

1986년 11월17일 총장실 점거사태는 대학당국이 독재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한, 제주대학교 개교이래 가장 치욕스런 일로 꼽히는, 사상 최대 무더기 제명조치로 이어진다. 제명조치 대상 학생 7명 중에는 총장실 점거에 가담한 학생 뿐만 아니라 운동권 출신 총학생회장 후보도 포함시켰다.

이는 총장실 점거사태에 따른 징계조치라기 보다는 학생운동권 진영의 학생회 진출을 가로막기 위한 차원의 성격이 짙었다. 경찰도 이에 합세해 총학생회장 후보와 선거참모에 대해 '광주학살 책임규명'이라는 문구가 선거홍보물에 들어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에 대해 '유언비어 날포죄'로 즉결심판에 회부한다. 또한 총장실 점거사태에 가담한 학생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돌입한다.

다음은 제주대학교가 1986년 11월19일 긴급 학.처장 회의에서 결정한 학사징계조치 결과 및 경찰의 지명수배 현황.
▲제명처분 학생 = 지경호(사회 4) 현맹수(사회 4) 유창부(경영 3) 현혜숙(과교 3) 김현실(수교 4 휴학) 황인호(국문 2) 현길호(법 2)
▲경찰 지명수배(제대신문 보도기사) = 지경호(사회 4) 현맹수(사회 4) 유창부(경영 3) 모성룡(무역 3) 현혜숙(과교 3) 황인호(국문 2)

운동권학생의 학생회 진출을 막기 위한 '방해공작' 차원에서 촉발된 총장실 점거사태는 겉잡을 수 없는 파장을 갖고 왔다.

학생들은 즉각적으로 이에 대응하고 나섰다. 19일 대규모 교내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학교당국을 강력히 비난한데 이어, 20일과 21일, 24일, 26일에는 4차례에 걸쳐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전 학과 수업거부를 결의했다.

21일부터 시작된 '제명처분 철회' 촉구 수업거부에 학교당국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11월20일 치러진 제주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19일 제명처분된 운동권 출신의 현길호 후보가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되자, 그동안 펴왔던 '방해공작'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 것 아니냐는 내부 지적도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운동권학생의 학생회 진출을 막기 위한 방해공작, 총학생회장 후보와 참모진에 대한 강제연행, 총장실 점거, 무더기 제명처분, 무더기 지명수배 등의 일련의 상황은 학생들의 분노를 초래하기에 충분했다.

비상학생총회를 통해 전 학과가 수업거부에 들어가자, 교내는 온통 학교당국과 경찰을 규탄하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은 학과별, 단과대별로 야외 잔디밭에 모여앉아 시국토론회를 가졌고, 전체 학생집회 때에는 수천명이 모여들었다.

수업거부 사태는 24일부터 일부 학과에서 수업을 다시 시작해 26일쯤에야 거의 정상화가 되었다. 한편 지명수배를 받던 지경호.현맹수(사회학 4)는 24일 본관 2층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연일 비상학생총회에 수업거부...고창후씨 등 또다시 전면 투쟁

'제민투위' 사건으로 알려진 고창후(법학 4)는 9월 '애국도민들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가 경찰에 또다시 연행돼 구류를 살고 나온 뒤, 11월27일 '제주대학교 장기집권음모분쇄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은 고창후가 맡았고, 황인호(국문 2, 당시 인문대학 학생회장 당선자, 11월19일 총장실 점거사태로 제명처분) 등이 이 위원회에 포함됐다.

이들은 위원회를 발족시킨 후 교문밖으로 진출해 출동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히 대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던 학생들은 은신의 폭이 극히 좁았다. 이들은 낮에는 대학내에 있다가, 밤에는 학내 어딘가에 숨어서 지내거나, 불심검문 때문에 버스를 타지 못하고 밤중에 산길을 걸어야 했다.

앞서 경찰에 연행된 지경호와 현맹수가 제주대 교문앞을 시작해 봉개동을 거쳐 제주시 동문로터리까지 '고난의 행군'을 하다 야간훈련 중인 예비군대원들로부터 검문(?)을 당했다는 야사가 전해지는 것처럼 다른 학생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1월6일 인문대학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으나, 11월19일자로 제명조치된 황인호씨(43. 현 북경중국어학원장)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총장실 점거로 경찰로부터 지명수배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 인문대학 뒷편 산길로 산천단검문소를 지나서 산업정보대학까지 걸어서 이동했어요. 그곳에서 산업정보대 탈춤반 학생의 도움으로 제주컨트리클럽까지 걸어서 갔는데, 얼마나 멀게 느껴지던지... 그곳까지 간 후에야 버스를 타고 서귀포로 이동했는데, 경찰이 내가 서귀포시내에 은신할만한 학생들의 집을 압수수색했다는 말을 듣고, 이 또한 마음이 편치 않더라구요."

11월27일 장기집권음모분쇄투쟁위원회의 교문앞 투쟁을 벌인 수배자들 중5-6명은 그날 밤 사회과학대학(현 법정대학) 건물 지하 보일러 배관실에 숨어 지냈다.

#"방화가 아니라, 우리의 뜻 전달하기 위해 화염병 투척계획 준비"

그리고 11월27일 또는 28일쯤 제주시내 모 거처에 모여서 12월1일 싸움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서 결정된 것이 바로 12월1일 아침 민정당 제주도지구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이다.

'일련의 사태의 책임이 학교보다는 정치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고, 또 이에따른 학내투쟁은 한계가 있다'는 시각이 이 싸움을 계획하게 했다.

▲ 황인호씨가 1986년 12월1일 발생한 민정당 제주지구당사 화염병 투척사건과 관련해, 헤드라인제주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황인호씨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수배자들이 11월 28일쯤 제주시 중앙로 현대약국 앞에서 피셀(유인물 배부, 페이퍼의 약자를 따서 만든 운동권진영의 당시 은어)을 했는데, 잡힐 줄 알았는데 잡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죠. 그래서 나온 의견이 마지막으로 제주시청 앞에서 한번 싸움을 하고 정리하자. 무조건 유인물 뿌리고 잡히는 것이 아니라,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진다는 것은 방화하겠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집권여당에 대한 규탄의 성격을 띤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 다음 제주시청 앞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유인물을 나눠주며 우리의 뜻을 전달하자는 것이었죠."

고창후씨(44. 당시 법학 4, 현 변호사)도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방화목적은 아니었어요. 실제 방화할 목적이었다면 한밤중에 했겠죠. 시민들에게 우리의 주장을 알리려는 뜻이 강했기 때문에 시간을 오전 출근시간대로 정했던 것이었죠. 화염병에 불을 붙여 던진 것은 맞지만, 왜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시민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거예요."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을 논의하면서 참여키로 결정한 학생은 7명이다.
고창후(법 4) 유창부(경영 3) 오경희(사회 3) 모성룡(무역 3) 문정혜(통공 4) 현혜숙(과교 3) 황인호(국문 2)가 참여키로 했다.

여기서 고창후와 오경희, 문정혜는 당시 경찰의 지명수배자가 아니었으나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창후씨는 경찰에 연행될 상황이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한해 3번째 옥살이를 각오하고 또다시 주동자로 나서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6년 들어 두번째 유치장을 살고 나와보니, 이미 사태가 불거져 있었어요. 총장실 점거사태에 무더기 제명조치.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저 말고도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니 제가 또 디머(주동자)로 나서게 된 거예요."

#등사기 구입하지 못하자, 3백여장 유인물을 일일이 손으로 써...

이들은 제주시내 모 거처에 모여 12월1일 제주시청 앞 가두시위에서 뿌릴 유인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등사기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때문에 유인물은 자필로 직접 작성했다.

이 유인물의 제목이 바로 '왜 우리는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던져야 했던가'다.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던져야만 했던 당위성을 역설하며, 군사독재 타도와 경찰 규탄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이들은 A4크기의 누런용지에 먹지를 받혀 2장씩 작성하는 방법으로 유인물을 썼다. 7명 정도가 작성한 분량은 대략 200-300장 정도.

화염병은 유창부를 중심으로 해 몇명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화염병은 4개가 만들어졌다. 모든 준비를 끝낸 후, 이들은 현재 이도지구 공사현장 부근의 과수원에 숨어있다가 제주시청 방면으로 이동했다. 쌀쌀한 날씨라 두툼한 점퍼안에는 화염병과 유인물이 숨겨져 있었다.

7명이 나란히 제주시청 정문 맞은 편 쪽에 위치해 있던 민정당 제주도지구당사 앞에 도착했다. 남문파출소 쪽에는 전경 2-3명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주저하지 않고 '독재정권 타도' 구호를 외치며 '꽃병'이라 불리우는 화염병에 불을 붙여 건물 2층 민정당사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순간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화염병 하나가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나머지 화염병들은 건물외벽에 부딪히면서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막 출근해서 책상정리를 하고 있던 민정당사 직원들은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출근길 시민들도 놀라 발길을 멈춰섰다.

화염병을 던진 이들은 남문파출소 쪽에서 전경 몇명이 쫓아오자 제주시청 정문앞을 지나 현 어울림마당 북쪽 도로 한복판으로 들어선다.
지나가는 차량들을 막은 이들 7명은 '왜 우리는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던져야만 했는가'라는 손수 작성한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시위를 벌였다.

#5공화국 출범 후 첫 화염병 시위...7명 모두 연행

제5공화국 출범 후, 제주에서는 처음 있는 화염병 가두시위였다. 버스를 타고가던 시민들과 학생들은 이들의 시위모습을 그대로 지켜봤다. 10여분간 차량통행이 막혔으나 원성을 자아내는 시민들은 없었다.

곧이어 사복경찰과 전경들이 출동해 이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독재타도' 구호는 경찰차에 강제로 실려가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다.

제주시 관덕정 옆 제주도경으로 끌려간 이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집단구타. 정보과 사무실에 나란히 서 있는 이들에게 경찰은 구둣발과 주먹으로 마구 폭행했다.

그리고는 각각 분리하여 조사실로 끌고가서는 혹독한 조사를 시작했다. 고창후씨는 대공과 지하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고, 황인호씨는 병기창고와 비슷한 곳에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의 집단구타는 예사...대공분실서는 '물고문' 시도까지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됐고, 폭행은 계속됐다.
고창후씨는 당시 '물고문' 시도까지 있었다고 말한다.
"대공과에서 조사를 받았어요. 지하 대공분실이었는데, 아마도 경찰은 물 고문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여러 명이 몰려와 발로 차고 하며 때리더니, 물 주전자와 수건을 준비하고 온 후, 분실의 긴 의자에 누우라고 했어요. 누우니까 머리는 모서리쪽에 있어서 물 고문할 자세가 나오지 않은거죠. 그랬더니, 경찰은 '뒤로, 좀더 뒤로 가'라며 제 머리가 의자 모서리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유도했죠. 그런데 그만 의자 다리가 부러져 버린거에요. 그래서 아마도 경찰이 고문을 포기해버린 것 같아요. 뭐랄까. (의자다리가 부러진 것에 대해)일종의 징크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조사가 이뤄지는 동안 구타는 계속됐다.
"11월 유치장에 구금될 때인데, 유치장에서 풀려나기 하루전에 경찰이 쇠고기를 사줘서 먹은 적이 있어요. 영문도 모르고 먹은거죠. 그런데 일주일 정도 있다가 다시 잡혀오니까 경찰이 기분이 많이 나빴었나 봐요. 오자마자 때리면서 '서장님이 데모하라고 고기 사준줄 아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쇠고기'의 의미를 알게 된 거죠."

황인호씨의 경우에도 비슷한 증언을 한다.
"처음에 다같이 정보과 사무실로 연행될 때부터 구타가 시작됐어요. 모두 끓어 앉으라고 한 후, 십여명의 형사들이 돌아가면서 무차별적으로 때리기 시작했어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폭력은 심했다고 말한다.
"1층에 있는 병기창고같은 곳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저는 이미 현상수배가 된 처지라 경찰이 가시눈처럼 보더라구요. 그쪽도(경찰) 감정이 상했는지 많이 때렸어요. 아무튼 첫날은 엄청나게 터졌어요. 경찰 진압봉으로 어깨와 허벅지, 허리를 무차별적으로 가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쓰러지면 구둣발로 밟아대고 하면서...."

잠을 재우지 않는 것도 조사의 한 방법이다.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밤샘 조사를 했는데, 똑같은 진술서를 수차례 반복해서 쓰도록 했다.
"똑같은 진술서를 여러번 반복해서 쓰도록 했는데, 한번 다 써서 건네주면 읽어본 후 '똑바로 말하라'며 때리다가 다시 쓰도록 하고, 또 그렇고. 이건 수사기법 중 하나인 것 같은데 같은 글을 여러번 쓰도록 하다보면 정신이 혼미해져 처음에 자신이 진술한 것과 상반되거나 다른 추가적인 내용이 나올 수 있거든요. 아마도 그걸 유도한 것 같아요."

이것 뿐만이 아니다. 분리해서 조사를 하다 각 부서 책임자끼리 회의를 하면서 진술서 중 서로 말이 안맞는 부분이 있거나 부족하다 싶으면 다시 와서 구타를 했다고 당시 연행자들은 증언한다.

3일째 되던 날. 7명 중 고창후와 황인호는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모성룡과 유창부는 구류 15일, 오경희와 현혜숙 문정혜는 구류 7일에 처분되었다.

▲ <제주신문 1986년 12월5일자 7면>
제주대생 2명 구속
-시위관련

제주경찰서는 4일 제주대 학생시위와 관련 검거된 황인호군(22. 국문학과 2) 등 2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유창부 군(22. 경영학과 3) 등 5명을 즉심에 넘겨 7-15일의 구류처분을 받게 했다.
이들은 지난달 17일 제주대 총장실 점거시위 이후 경찰의 수배를 받아왔는데 지난 1일에는 민정당 제주도지구당사앞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유인물을 뿌리면서 제주시청 후문 부근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다 검거됐었다.
이날 구속 및 구류학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속=고창후(24. 법학과 4) 황인호(22. 국문학과 2)
▲구류=오경희(21. 사회학과 3) 현혜숙(21. 과학교육과 3) 문정혜(22. 통신공학과 4) 이상 7일, 모성룡(24. 무역학과 3) 유창부(22. 경영학과 3) 이상 15일.
<제주신문 1986년 12월5일자 7면>


▲ <제대신문 1987년 12월10일>
民正黨舍에 화염병 투척
7명 가두시위, 2명 구속.5명 구류

지난 1일 오전 9시30분경 본교생 7명이 '장기집권 음모분쇄' '학원탄압중지' 등을 외치며 민정당 제주도지구당사에 화염병을 던진 후 시청후문 부근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이는 지난 27일 발족한 '제주대학교 장기집권음모 분쇄투쟁위원회(위원장 고창후. 법 4)의 주도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연행된 학생은 고창후(법 4) 유창부(경영 3) 오경희(사회 3) 모성룡(무역 3) 문정혜(통공 4) 현혜숙(과교 3) 황인호(국문 2) 등이다.
이들은 시위도중 '왜 우리는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던져야 했던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렸다.
한편 경찰에 연행된 이들 학생 중 고창후.황인호 군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모성룡.유창부군은 구류 15일, 오경희.현혜숙.문정혜양은 구류 7일을 선고받았다.
<제대신문 1987년 12월10일>


▲ <제주신문 1987년 2월13일자>
화염병 던진 대학생
징역 5년씩을 구형

지난해 제주대 학생시위를 주도하고 민정당 제주도지구당사에 화염병을 던져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과 방화미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됐던 고창후(25. 제주대 법학과 4년 제적) 황인호(21. 제주대 국문학과 2년 제적) 피고인 등 시위관련  대학생 2명에게 징역 5년이 각각 구형됐다.
12일 상오 제주지법 형사합의부(재판장 양승록 부장판사) 심리로 법원2호 법정에서 열린 이날 첫 공판에서 관여 제주지검 전창영 검사는 이와같이 구형했다.
이날 법정주변에는 1백여 경찰 교도관들이 나와 경비했는데 선고공판은 오는 26일 상오 10시.
<제주신문 1987년 2월13일자>


▲ <제주신문 1987년 5월16일자>
시위관련 두 피고인
고법에서 집유 3년

대학생시위와 관련,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던 고창후(25. 제주대 법학과 4년 제명) 황인호(21. 제주대 국문학과 2년 제명) 피고인 등 학생 2명이 지난 12일 광주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이 선고돼 이날 석방됐다.
이들은 지난해 제주대의 학생시위를 주동하다 방화미수.집시법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돼 지난 2월 제주지법 형사합의부에서 징역 1년6월씩의 실형이 각각 선고됐었다.
<제주신문 1987년 5월16일자>


#"법정은 우리에게 유죄를 선고하지만, 역사는 우리의 정의를..."

황인호 고창후의 구속사건은 1985년 처음 정치투쟁이 전개된 후 지경호 현맹수에 이어 두번째다.

이들이 1심 첫 공판을 받은 것은 1987년 2월12일. 제주지법 정문 앞은 이들의 공판을 보기 위한 학생들이 몰려들면서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은 일부 학생에게만 이 공판을 볼 수 있도록 입장시키고, 나머지 학생들은 정문 앞에서 막아섰다.

결심공판에서 고창후는 최후진술을 통해 자신이 화염병을 던지면서까지 반정부 투쟁에 나서야 했던 이유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였다. 이어 황인호는 특유의 큰 목소리로 법정이 떠나갈 듯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황인호는 최후진술 말미에 "이 법정은 나에게 유죄를 선고하더라도, 역사는 우리의 행동이 정의로웠음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겨 당시 운동권진영에 '명 진술'로 회자되기도 했다.

여기에 고창후씨는 광주고법에 항소하면서 제출한 자필 '항소이유서'가 운동권진영에서 학습서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이 항소이유서에는 왜 정치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투쟁에 나설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항소이유서는 그해 학생회 기관지에 전문이 실리기도 했다.
 

당시 제주지검 전창영 검사는 이들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재판부(재판장 양승록 부장판사)는 2월26일 선고공판에서 이들에게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들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은 1987년 5월12일 열렸다. 제주교도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옮겨 수감 중이던 이들은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 이 글은 제주대학교 여학생회 기관지인 <햇귀3호>(1987)에 실린 글로, 글쓴이는 화염병 투척사건으로 연행됐던 여학생 3명 중 한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당시 삼엄한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글쓴이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체험수기 '어둠의 날들'
 

작년, 총장실 점거 사건과 관련되어서 경찰서와 유치장에서 생활해야만 했던 악몽이 되살아난다.

이루견딜 수 없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그 많은 날들을 꿋꿋이 생활해 나가고 있는 구속자 선후배와 동료들에 비하면 나의 구류 일주일은 아무것도 아닐런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의지와 체력이 남들보다 약했던 나에게 있어 일주일은 일년을 사는 것 만치 멀었고 고통스러웠다.

검거되어,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간 곳은 관덕정에 위치한 다름아닌 시경 2층 정보과였다.

우람한 체구의 형사들이 우리들을 맞았는데 그들의 주먹과 발길은 왜소한데다가 지쳐버린 우리들의 육신을 가차없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그 곳에서 기본적인 조사를 받고 울분을 채 삼키기도 전에 불려간 곳은 대공과. 대공과로 가자마자 우리들은 각각 흩어져 세 사람의 담당형사에게 취조를 받았다. 정보과와는 달리 아주 치밀해 정신이 곤두설 정도였다.

형사들은 교대로 우리들을 현혹시키며 심문했고 사흘동안 잠시의 잠도 허락하지 않아 극도의 긴장감과 초조감을 자아냈다. 이러한 낯선 감정을 감당해 내기도 힘들었지만 민주적 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우리들의 행동을 마치 용공, 좌경사범인 양 왜곡하며 우겨대는 작태 속에서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답을 요구해놓고서는 정직한 대답도 외면하고 손찌검, 꼬집기, 머리채 쥐어뜯기 등이 일쑤였다. 어떻게 인간이 같은 인간을 이렇게 취급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진술서를 쓰기를 강요해도 더 이상 쓸게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그 사정을 말하면 "이 쌍년이 어디서 눈물 흘려!"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단련된 체력을 한껏 과시라도 하듯 때리기도 했다.
이런 비통한 순간, 옆방에서 들려오는 학우들의 고통스런 신음소리, 찢어질듯한 비명소리는 언젠가 닥쳐 올 고문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를 전율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 희망이랄까 위안이 있었다면 화장실 갈 때와 아침 세면시 동료들을 잠깐 보는 것.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면서 얼굴을 쳐다보면 반가움도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가슴만 미어져 올 뿐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시퍼렇게 멍들어 갔다. 어떤 때는 그것도 모자라 발길질과 몽둥이 찜질로 다리를 절룩거리기도 하였다. 밤 동안의 안부조차 의심스러운 날들이 너무나 야속했다. '몸 조심 해라'는 인사를 건네며 헤어져야 하는 그 마음이란......

사흘간의 취조가 끝난 후, 고창수.황인호 학우는 구속, 나 외에 네명은 즉심에 넘겨져 각각 구류 7일과 15일씩을 받았고 곧 유치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가끔씩 경찰서장 정보과장에게 불려가서 훈화와 탐색 등을 받는 것 외엔 더 이상의 취조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의 생활 역시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철장속에서의 24시간은 언제나 인위적인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철장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시간은 아침 세면 때 뿐이고 6시에 기상, 9시 취침하는 반복된 생활이 계속되었다.

썩은 곰팡이 냄새와 화장실 냄새도 몸에 베어 무감각해질 무렵 오로지 그리운 것은 자유에 대한 몸부림, 우리들은 말하고 싶었고 급기야는 벽 낙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세면하러 나간 틈을 이용하여 순찰하던 교도관에게 들키고 말았다. 우리는 하루종일 낙서를 물로 지우고 벌을 받는 수고를 해야 했다.

식사는 풀이 다닥다닥 붙은 부풀어 오른 누린 꽁보리밥과 깍두기가 고작이었고 잠은 담요를 깔고 여분을 덮어서 잤다. 그러나 인원이 급증한 때는 담요가 모자라서 서로 부등켜 안고 추운 밤을 지세워야 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연장되었더라면 미쳐버렸을 것 같은 악몽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우리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딸의 모습도 이방인 같은 지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어머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불효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 민주화의 그 날에 마음껏 효도하리라!'

오 참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 그 이후는...>

당시 구속되었던 2명 중 고창후씨는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헤드라인제주 특별기획 제4편 보도>
제주대 인문대학 학생회장에 당선되고도 제명처분과 법정구속으로 더 이상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던 황인호씨는 1987년 5월 출소한 다음 당시 '사인자' 서점과 함께 사회과학서적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대동서점에서 복사실을 운영했다. 복사실이라고 해봐야 복사기 1대를 설치해놓고, 운동권 학생들이 요청한 복사물을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 황인호씨  
 
1987년 2학기 학교당국의 제명처분 학생에 대한 복학조치로 복학을 해 학내에서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아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2학기 총장실 점거사건이 있었다. 1986년 겨울 무더기 제명처분을 내린 학교당국에 대한 항의성 점거농성이었다. 3개월간 점거농성을 벌인 후, 그는 자퇴했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의미가 없어진 거에요. 정권의 눈치나 보며, 학생들을 감싸안아 주지도 못하는 대학, 저에게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어요. 총장실 점거농성을 한 후 심각한 고민에 빠졌죠. 이러면서도 내가 꼭 대학을 다녀야 하나. 결국 포기하기로 했죠. 졸업장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마음을 먹은거죠."

황인호씨는 그후 1988년 제주시 관덕정 옆에 <청솔서고>라는 서점을 차려 운영했다. 이 서점은 일반 서점처럼 새 책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과학서적과 민중서적들을 모아놓고 복사를 해주거나 대여를 해주는 곳이었다. 책을 구입할 경제적 여력이 없는 운동권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상술(?)'이었다.

그러나 그는 1988년 4월 국회의원 선거 며칠을 앞두고 발생한 제주MBC 선거개표 방송사고와 관련하여 또다시 시위를 벌이다 구속되었다. 당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시위를 벌이다 일부 시위대가 삼담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해 경찰관 1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계획된 습격이라고 하기 보다는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파출소 습격사건 현장에 황인호씨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련의 시위책임을 물어 당시 황인호씨를 비롯한 지도부 5명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는데, 그 중 그만이 유일하게 구속이 된 것이다.

다시 출소한 그는 오일장에서 칡즙장사, 학습지 외판원, 이벤트 기획사, 그리고 1991년부터는 정치컨설팅사인 <베스트아이템>이라는 회사를 차려 1998년까지 운영한다. 이 회사를 운영하던 중 그는  1996년 중국으로 건너가 어학연수도 하고 현지에서 광고잡지 쪽 일을 하기도 했는데, 천진의 <선달호텔>이라는 곳에서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으로 그는 제주에서 '중국통'이 되어 1998년 <북경중국어학원>, 그리고 2001년 <제주중국여행사>를 설립해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 사진은 시위 중 경찰에 연행되어가는 모습으로, 이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계 없습니다. <6월항쟁 제주추진위원회 제공>

[6] 1986년 12월,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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