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스웨터를 잡아라' 최루가스로 얼룩진 제주의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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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스웨터를 잡아라' 최루가스로 얼룩진 제주의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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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4] 1986년 '민주헌법쟁취위'와 '제민투위'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보고자 합니다. <헤드라인제주>
▲ 1986년 들어 제주대에서는 연일 집회와 시위가 계속된다. 제주대 학생운동권 진영의 활동은 그 어느시기 보다도 매우 활발히 이뤄졌다. 사진은 제주대 진입로에서 있었던 한 교문앞 시위모습. <사진제공=6월항쟁 20주년 제주사업추진위원회>

[4] 1986년 '민주헌법쟁취투쟁위'와 '제민투위'

1985년 12월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지지후보를 내고 당선시킨 제주대 운동권진영은 대중적 정치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1985년 12월2일에는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가 끝난 직후인 오후 3시15분께, 야외음악당에 모여있던 200여명은 '민주화투쟁실천선언문'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독재타도'를 외치며 교문밖으로 나가 아라동 제1횡단도로 목석원 남쪽 남구사 입구까지 진출한다.

이곳에서 출동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 오후 4시50분께 자진해산했는데, 이 시위과정에서 오만식(행정 4, 전 제주도의회 의원) 등 6명이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후 12월4일 모두 풀려난다.

▲ <제대신문 1985년 12월9일자 1면>
민주화 실천대회
-2일, 2백여명 가두진출

본교생 약 2백여명은 지난 12월2일 민주화투쟁실천대회를 가졌다.
이들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야외음악당에서 있었던 총.부학생회장 1차 소견발표회 뒤 3시15분께 '민주화투쟁실천선언문'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학원탄압 중지하라", "독재정권 퇴진하라", "수입개방 철회하라", ""민주제개헌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아라동 제1횡단도로 목석원 남쪽 남국사 입구까지 진출하여 출동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 4시50분께 자진 해산했다.
한편 이날 시위에서 오만식(행정 4)군 등 6명이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후 12월4일 모두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제대신문 1985년 12월9일자 1면>

1986년 출범한 제주대 총학생회에는 운동권 진영에서 3명이 집행부로 들어갔다. 사실상 운동권적 성향의 총학생회 출범으로, 이때부터는 집회와 시위가 더욱 빈번해진다.

학내에 상주해있던 경찰과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들의 학내사찰도 학생운동권의 적극적 공세에 부딪히게 된다. 조용할만 하면 학내에서는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뿌려졌고, 경찰은 유인물을 살포한 학생들 잡기에 나섰다. 학생과 경찰이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계속되었다.

#'붉은스웨터를 잡아라'...경찰 유인물 살포자 색출 검색

유인물 살포와 관련하여 제주대 학생운동사의 중요한 야사 중 하나가 바로 '붉은 스웨터를 잡아라'다.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1986년을 전후해 운동권진영에서는 이 이야기가 크게 회자되었다.
운동권 학생들이 교내 건물 옥상 등에서 유인물을 뿌려대고 현수막을 내걸곤 하자 학교당국은 평소에도 대부분의 옥상문을 봉쇄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단과대학의 옥상문이 열려 있었고, 그 열려진 문으로 한 여학생이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 여학생은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스웨터는 겉은 빨갛고 내면은 다른 색을 가진 옷으로, 뒤바꾸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그 여학생이 미리 준비해온 유인물을 살포했다. 유인물은 바람에 흩날렸고, 이 광경은 경찰에 목격되었다. 경찰은 그 여학생이 '붉은 스웨터'를 입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제주대학에서 내려오는 길목에서 모든 버스를 대상으로 불심검문을 시작했다. 붉은 스웨터를 입은 여학생만 골라내어 붙잡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빨간 스웨터는 끝내 잡을 수 없었다. 옷을 뒤집어 입어 색깔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야사는 1985년까지 매우 조심스럽게 이뤄지던 '유인물 살포', 일명 '피 뿌리기'(페이퍼의 약자를 따서 유인물 살포작업을 의미하는 당시 운동권 진영의 은어)가 매우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주헌법쟁취투쟁위 4월 시위...관련자 학사징계

학생운동도 점차 활기를 띄고 있었다. 1986년 상반기 대표적 반정부 시위는 4월 발족한 '민주헌법쟁취투쟁위원회'와 5월 발족한 '제주대학교 민주화투쟁위원회'(이하 제민투위)로 집약된다.

민주헌법쟁취투쟁위가 발족한 것은 4월8일. 김영산(행정 4)이 위원장을 맡았고 현맹수(사회 4) 등 4명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들은 4월8일 오후 1시께 제주대학교 본관 앞에서 발대식을 가졌다. 이어 "독재정권 물리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150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으로 진출해 전경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는 오후 3시까지 계속됐다.

이튿날인 9일에는 제14대 총학생회 발대식이 끝난 후, 민주헌법쟁취투쟁위원회가 또다시 주도해 '4.19 탐라선언' 등의 유인물을 뿌리며 100여명의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4월9일 위원장인 김영산과 부위원장인 현맹수 홍순자 등 4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 20일에서 5일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대학당국에서는 관련자에 대한 학사징계가 내려졌는데, 김영산은 무기정학, 현맹수 유기정학 2주, 홍순자 유기정학 1주, 양진혁 근신 2주를 각각 처분받았다.

▲ 제대신문 1986년 4월10일자
본교생 1백50명 시위, 민주헌법 쟁취투위 발족

제주대 민주헌법쟁취투쟁위원회가 지난 8일 발족, 8.9일 시위를 벌였다.
8일 오후 1시 발대식이 끝난 후 "군사독재 물리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는 현수막을 앞세운 가운데 1백50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밖으로 진출, 전경들과 대치 "민주헌법 쟁취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출동한 전경들과 투석전을 벌이다 오후 3시경 자진 해산했다.
도한 9일에도 제14대 총학생회 발대식이 끝난 후 '4.19 탐라선언' 등의 내용이 적힌 유인물들을 뿌리며 1백여명의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벌이다 자진 해산했다.
한편, 민주헌법쟁취투위 발족과 관련, 위원장 김영산(행정 4), 부위원장 현맹수(사회 4) 군 등 4명이 9일 경찰에 연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대신문 1986년 4월10일자>


제대생 1백명 시위
제주대학교 학생 1백여명(경찰 추산)이 9일 하오 1시30분 교내 자유의 광장에서 실시된 86학년도 총학생회 발대식에 참석한 후 '민주헌법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이다 하오 3시께 자진해산했다.
또한 8일 하오에도 학생 1백여명(경찰 추산)이 교문밖 1백m 떨어진 교수회관 아파트 입구까지 진출,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제주대 민주헌법쟁취투쟁위원회 위원장 김영산군(행정학과 4년) 등 4명을 연행, 조사하고 있다.
<제주신문 1986년 4월10일자 7면>
▲ <제주신문 1986년 4월10일자 7면>

4.19 제26주년 기념식 가져
-김영산(제민헌투위장) 등 4명 학사징계 당해

4.19의거 26주년 기념식이 지난 4월16일 12시 학생회관 앞 마당터에서 열렸다.
총학생회 총무부장 양용혁(행정 3) 군의 사회로 열린 이날 기념식은 국민의례, 4.19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추모사, 4.19선언문, 결의문 낭독순으로 이어졌는데, 폐막식후 약 1백여명의 학생들은 20여분간 교내시위를 벌이다 자진 해산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4월8.9일 시위에 참가, 연행됐던 4명의 학생들에 대한 경과보고와 함께 인권결사수호위원회(공동위원장 : 총학생회부회장.대의원의장.써연회장)가 구성됐다.
한편 지난 4월8.9일 양일간 시위에 참가 구류 20일에서 5일의 형을 받았던 제민헌투위 관련학생 4명에 대한 학사징계가 4월19일자로 내려졌는데, 징계내용을 보면 김영산(행정 4)=무기정학, 현맹수(사회 4)=유기정학 2주, 홍순자(영문 4)=유기정학 1주, 양진혁(사학 3)=근신 2주로 밝혀졌다.
이들 중 양진혁군은 이미 1학기 중간고사를 치렀고, 현맹수.홍신자 양은 4월30일부터 실시된 추가시험에 응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대신문 1986년 4월30일자>
▲ <제대신문 1986년 4월30일자>

민주헌법쟁취위원회가 이틀간의 싸움을 끝으로 지도부가 모두 경찰에 연행되면서 사실상 정리되자 제주대 학생운동권 진영은 곧바로 또다른 싸움을 계획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민투위다.

#5.18 추모제에 맞춰 고창후씨 등 3명 제민투위 발족

제민투위는 군사독재정권 타도와 광주학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위원장은 고창후(44. 당시 법학 4, 현 변호사), 홍보담당 부위원장에 강성순(44. 당시 법학 4, 현 전교조 제주지부 총무국장), 군사독재타도 투쟁담당부위원장에 김현실씨(44. 당시 수교 4, 현 중등교사)가 각각 맡았다.

소위 '디머'(주동자)로 불리우는 이들 3명은 민주헌법쟁취투쟁위 지도부가 경찰에 붙잡혀 가자 곧바로 5월싸움을 준비한다.

▲ 사진은 1986년 5월 제민투위 발족식 모습. 사진 오른쪽 단상앞에 서 있는 사람이 고창후씨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사람이 김현실씨, 왼쪽은 강성순씨. <사진제공=고창후 변호사>

이들이 처음 집회를 가진 것은 5월13일. 이날 낮 제주대학교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는 총학생회가 주관한 '광주민중항쟁 제6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광주학살과 관련한 잔혹한 사진이 전시되면서 처음 본 이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이 추모제에 참석했다. 제대신문은 당시 5백여명이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이 추모제가 끝난 직후인 오후 3시께 같은자리에서 곧바로 군사독재타도와 민족통일을 위한 제민투위 발족식이 열렸다. 이들은 발족식을 가지면서 현수막으로 대열 양옆을 가렸다. 이는 경찰과 학교당국이 시위를 주동하는 학생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한 후, 해당학생의 가족들에게 연락해 시위를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데 따른 것이다.

#"환경미화원 아버지 학교에 올라와 시위 만류..."

위원장을 맡은 고창후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고창후의 아버지는 서귀포시청 소속 환경미화원이었다. 학교당국의 연락으로 아버지가 학교를 찾아와 고창후 위원장을 말렸다.

"아버님은 청소차를 타면서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을 했었는데, 사전에 누가 연락했는지 집회하는 시간에 맞춰 학교에 올라왔어요. 사진(당시 제민투위 집회사진을 보여주며) 속 대열 양옆으로 현수막으로 가린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에요. 한참 앞에서 말을 하는데 가족들이 학생들을 데려가 버리는 일이 충분히 예견됐거든요. 부모님들이 올라와서 많이 만류했어요. 심지어 일가족들 모두 동원할 정도로 방해공작은 매우 심했어요."

▲ 고창후씨가 1986년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헤드라인제주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러한 방해공작에도 학생들은 "군사독재 타도하고 민족민주화 이룩하자",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 "독재헌법 철폐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신민당은 학살정권과 타협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이 부분에서 '반미'구호가 등장한 점이 눈길을 끈다. 제주대 학생운동사에서는 반미구호의 등장은 이날 집회가 처음이라고 전해진다. 이와관련해, 당시 집회에 참가했던 학생 중 일부는 반미구호가 나오자 자리를 떠났다는 얘기도 나온다.

오후 4시께 경찰은 교수아파트 동쪽 부근에 진을 치고 있다가 학생들이 접근하자 최루탄을 마구 발사하며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나선다.

투석전이 한참 전개되다 매서운 최루연기에 대열이 흐트러지고 교문안으로 후퇴하자 경찰은 물러서는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한다. 이때 부위원장인 강성순씨 등 7명이 연행된다.

#강성순씨 "백골단이 사지를 잡고 끌고가는데..."

강성순씨가 연행되는 장면은 정문앞 버스정류소에 있던 많은 이들에게 목격된다. 연약한 여학생 한명을 체포하는데 경찰 4명이 양팔과 양다리를 그대로 둘러 무자비하게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강성순씨의 옷은 옷대로 찢기어 지고, 신발 한쪽은 벗겨졌다. 무자비한 연행장면을 본 버스정류소에 있던 일반 학생들은 강성순씨가 태워진 경찰차를 가로막고 경찰에 강력히 항의한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 역시 제압하고 제주도경으로 끌고 갔다.

강성순씨는 당시 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 시위를 이끄는 지도부였기에 교수아파트 입구쪽으로 대열을 이끌 때 맨 앞에 섰어요. 한참을 구호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데, 갑자기 최루탄을 집중적으로 발사하기 시작해 후퇴를 하는데, 우람한 백골단들이 사지를 잡고 끌어갔어요. 아마 그 때 잡혀가면서 신발이 벗겨지고 옷도 찢겨졌는데 그걸 구경하던 버스정류소에 있었던 학생들이 차를 막아서는 바람에 차가 한참동안 멈춰섰어요."

경찰이 학생들을 연행해가자, 그날 시위는 더욱 격렬해진다. 경찰은 제주대 정문 앞 로터리까지 배수진을 치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 때 정문 옆 소나무밭에서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던 제주경찰서 모과장인 K경감이 학생들에게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K경감은 자녀가 이 대학에 다니고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에 있었다고 변명했는데, 학생들은 K경감을 민주광장으로 데리고 가 경찰에 연행학생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오후 6시30분께 학생들은 '시위학생 안전귀가 보장'과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조건으로 해 K경감을 풀어주고 자진 해산했다.

시위도중 연행된 학생 8명 중 주동자격인 강성순을 제외한 7명은 이날 저녁 모두 풀려났다. 강성순는 이틀정도 더 있다가 석방됐다.

경찰에서 풀려난 강성순은 한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 있어야 했다.
"데모했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나무라지는 않았어요. 스무살이 넘은 성인이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판단한다. 가족들은 욕도 안했어요. 근데 친구들에게는 정말 미안했어요. 친구들 부모님이 집으로 많이 찾아왔어요. 저는 이미 잡혔다 풀려나서 괜찮지만, 아직 붙잡히지 않은 친구들의 가족들은 걱정이 많았어요.
집에서 며칠 근신하는게 서로에 대한 예의니까 집에 그냥 있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바구니와 많은 잔돈을 주며 밖에 나갔다 오라고 하더라구요. 경찰서에서 나온 후 미행이 붙었던 것 같아요. 집에서 전화하면 도청당할 염려가 있어, 어머니가 시장 보러가는 척 하고 전화할 일 있으면 밖에서 전화하라고 잔돈을 집어주신 거에요."

이미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강성순은 경찰 미행 등으로 더 이상 제민투위의 싸움에 합류할 수 없었다. 때문에 제민투위의 마지막 '정리싸움'은 위원장인 고창후와 부위원장인 김현실 둘이서 해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주대생 2백명 시위 벌여
제주대학교 학생 2백여명(경찰집계)이 13일 하오 '광주민중항쟁 계승하여 민족민주화 투쟁에 총진군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날 하오 1시30분 총학생회 주관으로 광주민중항쟁 제6주기 추모제를 가진 뒤 군사독재 타도와 민족통일을 위한 제주대학교 민주화투쟁위원회(약칭 제민투. 위원장 고창후)의 발족식을 갖고 하오 3시40분부터 교문밖으로 진출, 진압경찰과 대치했다.
최루탄 발사로 교내까지 밀려간 시위대는 하오 5시께 다시 교문밖으로 진출, 투석으로 맞섰는데 이 과정에서 제주경찰서 대공과장 김00 경감이 시위학생들에 끌려가 2시간여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한편 경찰은 이날 시위에서 제민투 홍보담당부위원장 강성순(21. 법학과 4년) 등 8명의 학생을 연행했는데, 이날 하오 강양을 제외한 7명의 학생들을 모두 귀가시켰다.
<제주신문 1986년 5월14일자 8면>

▲ <제주신문 1986년 5월14일자 7면>

광주항쟁추모제 개최, '濟民鬪' 발족
民主化 요구, 시위 벌여

'광주민중항쟁 제6주기 추모제'가 지난 13일 총학생회 주관으로 학생회관 앞 마당터에서 열렸다.
5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날 추모식은 제문 낭독, 추모시 낭독, 광주항쟁 당시의 성명서 및 행동강령 낭독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어 군사독재타도와 민족통일을 위한 '제주대학교 민주화 투쟁위원회'도 발족ㅤㄷㅙㅅ는데, 위원장에 고창후(법학 4)군, 홍보담당 부위원장에 강성순(법학 4)양, 군사독재타도 투쟁담당부위원장에 김현실(수교 4)양 등이 각각 선임됐다.
'제민투' 발족식 이후 오후 3시경부터 4백여명(경찰집계 2백여명)의 학생들이 "군사독재 타도하고 민족민주화 이룩하자",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 "독재헌법 철폐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신민당은 학살정권과 타협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였다.
시위 학생들은 4시경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밀려 교문안으로 후퇴했다가 5시경 다시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강성순(제민투 홍보담당 부위원장)양 등 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제주경찰서 모과장 K경감이 교내에 있다가 학생들에게 붙잡혔는데, 학생들은 "연행학생들을 다음날까지 석방할 것", "시위학생 안전귀가 보장" 등을 요구조건으로 6시30분경 K경감을 풀어주고 자진 해산했다.
시위 도중에 연행된 7명과 교외에서 사전에 연행된 1명 등 8명의 학생 중 강성순 양을 제외한 7명의 학생들은 13일 저녁 모두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총학생회 사무실이 14일 밤 경찰에 의해 수색당한 것으로 총학생회측은 밝혔다.
<제대신문 1986년 5월15일>
▲ <제대신문 1986년 5월15일>

제주대생 80여명 도서관 점거농성
제주대학교 학생 80여명(경찰 집계)은 28일 하오 7시35분 본관 3층 도서관을 점거, '연행학생 석방하라' '민주헌법 쟁취하자'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29일 상오 11시30분 현재 농성 중이다.
이들 학생들은 이날 하오 5시30분 제주대학교 개교 34주년 기념 아라축전행사인 아라대동제를 마치고 '민주 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밖 3백m 교수아파트 입구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교내로 밀려들어 왔다.
교내로 들어온 학생들은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20여분간 투석전을 벌인 뒤 하오 7시30분 본관 앞에 집결했다가 도서관으로 뛰어 올라갔다.
학교당국은 학생들이 도서관을 점거하자 인터폰을 설치했는데 학생들은 학교측과의 대화에서 △연행학생 석방 △경찰학내 진입방지 △등사용품 등을 요구했다.
<제주신문 1986년 5월29일자>
▲ <제주신문 1986년 5월29일자>

80여명 도서관점거 농성
연행학생 석박 등 요구, 25시간 동안

본교생 1백50여명은 지난 28일 하오 5시30분경 제22회 아라축전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아라대동제를 마친 후 시위를 벌였다.
'민주쟁취' '파쇼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에 이어 6시경 교문앞 3백여m 교수아파트 입구까지 진출했다.
이어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가두진출을 저지하자 교내로 후퇴한 이들은 정문철책을 사이에 두고 투석전을 벌였다.
20여분간 투석전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던 학생들은 저녁 7시30분경에 본관 앞에 집결했다가 곧바로 중앙도서관 3층 제1열람실을 기습, 점검하였다.
80여명의 이들 학생들은 "연행학생 석방하라" "민주헌법 쟁취하자"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철야농성에 들어가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현 상황분석과 대처방안'에 대해 철야토론을 가졌다.
이들은 '제대 민족민주 학우'의 이름으로 '5.28 철야농성 성명서'를 채택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우리는 군사독재타도와 지난 27일 부당하게 연행된 4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이들 학우들이 연행과정에서 학교측의 수수방관한 자세와 5.28시위에서 경찰이 교문안까지 진출하는 과정에 총장의 요청이 있었는지의 진위파악, 그리고 연행학생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5월28일 20시부터 도서관을 검거, 철야농성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성명서에서 이들은 연행학생의 즉각 석방 및 학생연행을 담당한 교직원의 징계와 경찰의 교내진입에 대한 총장의 해명, 아울러 시위 및 농성학생에 대한 신분보장을 총장과 경찰의 연서로 보장할 것 등의 6가지 주장을 제시했다.
이들 농성학생들의 대표는 29일 하오 3시경 조문부 사회과학대학장을 통해 학교측과 경찰당국에 이들의 요구를 전달하여 김두희 총장과 면담, 적극 수렴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내고 연행학생들이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인권유린이 없었다는 것과 즉심에서 고창후 군이 구류 20일, 김현실 양이 구류 7일이라는 처벌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연행과정에 협조한 교직원을 공개토론하여 문제되는 사실이 나타났을 경우에는 징계에 처하겠다는 김 총장의 의사를 확인하고, 도서관 점거 약 25시간여만인 9시45분경 농성을 풀었다.
한편 이보다 앞서 지난 27일 밤 시내 학생회관에서 아라가요제가 끝난 후 가두시위를 하려했다는 혐의로 제민투위원장 고창후(법학 4), 군사독재타도 투쟁 부위원장 김현실(수교 4)양, 김영철(사회 4)군, 현혜숙(과교 3) 양 등 4명이 연행되었다.
<제대신문 1986년 6월3일자>
▲ <제대신문 1986년 6월3일자>

#제주시내 아라가요제 행사장 앞 가두시위 계획

소규모 학습조직인 소위 '언더'에서는 디머인 고창후와 김현실이 협의해 5월27일 밤 제주시 전농로 학생회관(옛 학생회관)에서 열리는 아라가요제가 끝난 후 그 곳에서 가두시위 할 것을 결정했다. 이 가두시위 계획은 '언더' 조직에 전파되었고, 많은 운동권진영 학생들이 이 아라가요제 구경에 나섰다.

고창후와 김현실은 미리 유인물을 준비하고 학생회관 건너편 길가에 숨어있었다. 아라가요제가 끝난 후 참가했던 학생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시점에 가두시위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사전에 경찰에 새어나갔다.

경찰은 아라가요제가 시작되자 이 행사장 일대에 경찰력을 배치하고 서치라이트까지 동원하여 시위에 대비하였고, 고창후와 김현실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던 고창후와 김현실은 아라가요제가 언제 끝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경찰의 삼엄한 경비로 중간에서 연락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창후씨는 당시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근처에 숨어있었는데, 아라가요제가 언제 끝나서 학생들이 몰려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 와중에 서치라이트까지 비추며 시위에 대비하는 경찰이 사방에 쫙 깔려 있으니 정말 난감했죠. 그래서 '다음에 하자', '이것으로 일단 정리하자' 는 얘기를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렇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 없어서 일단 밖으로 나가서 상황을 보기로 했죠."

밖으로 나올 무렵, 이미 아라가요제는 끝나고 관중들도 모두 돌아가고 없었다. 이들의 모습이 노출되자 마자 경찰은 이들을 곧바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현혜숙(과교 3)씨도 함께 붙잡힌다. 이 사건으로 고창후씨는 구류 20일, 김현실씨는 구류 7일의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다음날인 28일 학생들은 아라대동제를 마친 후 오후 6시께부터 교문 밖으로 진출해 격렬한 시위를 벌인다. 이어 오후 7시30분 중앙도서관 3층 제1열람실을 기습적으로 점거한 후,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들어간다.

4월 민주헌법쟁취위와 5월 제민투위의 싸움은 대중적 정치투쟁의 수위가 한층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또한 4월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집회 및 격렬한 시위는 소위 '언더'그룹의 조직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해 언더 조직은 급속히 조직확대를 꾀하게 된다.

#제민투위 위원장이었던 고창후씨는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부위원장이었던 강성순씨는 '일하는 사람들(노동상담소)'을 거쳐 현재 전교조 제주지부 총무국장으로 일하고 있고, 김현실씨는 중등교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고창후 제민투위 위원장, 그 이후는...>


   
 
  ▲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고창후씨  
 
5월싸움에 구류 20일을 살고 나온 고창후씨는 1986년에만 모두 3차례 경찰신세를 져야 했다.

제민투위 주도 시위로 5월에 20일의 구류처분을 받은 고창후씨는 이후에도 각종 시위 및 집회를 주도하다, 그해 9월 '애국도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제주시내에 배포하다 또다시 경찰에 체포돼 구류 10일 처분을 받는다.

그는 두번째 유치장 신세를 진 후, 또다시 11월27일 발족한 '장기집권 음모 분쇄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돼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된다.

결국 그는 12월1일 오전 9시30분 황인호씨(당시 국문 2, 총장실 점거사태로 인해 학교당국으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문대 학생회장 선거에 당선되었다) 등 7명과 함께 제주시청 후문 부근의 민정당 제주도지구당사에 화염병을 던지고 '왜 우리는 민정당사에 화염병을 던져야 했던가'라는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벌인 혐의로 또다시 경찰에 체포된다.

" 그 때 당시는 상황이 군사정권의 악정이 가장 심했던 때여서 탄압도 심했고, 그래서 학생신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정의감이 대단했었던 것 같아요. 군사정권이 무너질 때까지는 나는 투쟁한다. 그래서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 때에도 두려움은 별로 없었어요."

3번째 체포된 후 그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제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그는 1987년 2월26일 제주지법으로부터 징역1년6월을 선고받는다. 이어 5월12일 광주고법 항소심에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난다.

구속될 무렵 학교당국으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은 고창후씨는 출소 후, 1987년 6월항쟁 이후 제명처분이 취소되어 복학을 하게 된다. 복학 후 복학생협의회를 구성하여 활동한 그는 1988년 졸업해서는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돌아가신 故 이야성 전 전국농민회제주도연맹 의장을 통하여 안덕면 서광리에 정착하여 농민운동에 전념한다. '

그러다가 1989년 고향인 서귀포시로 돌아가서 서귀포시 대포동 동부관광단지 반대대책위원회 구성시 총무로 선임되어 다시 반대집회를 주도하게 된다.

그후 이영일씨가 서귀포 나라사랑청년회를 만들면서 구속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무렵 고창후씨는 나사청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1년정도 활동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마음의 갈등이 있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그동안 가졌던 생각이 혼란스러웠던 점도 있었고, 회의는 길고 실천력은 부족한 운동권진영 사람들에게도 회의적인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집에 가진 것이 없었어요. 뭔가 새로운 전기가 필요했는데, 사법시험을 발판삼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싶어 또다른 결심을 하게 된 것이죠."

그는 1991년 나사청 일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 사법시험 준비에 들어간다. 그리고 1993년 제35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6년 인천지법 판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1999년 8월 서울 남부지법 판사를 끝으로 판사생활을 접고, 제주로 내려와 1999년 10월 변호사를 개업한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예전에 가졌던 생각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게 돼요. 제 의뢰인들의 면면을 보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요. 어려운 사람들이 법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는 수임료도 최대한 저렴하게 하자는 생각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로 만족하며, 정치적인 문제에 연관시켜서 얘기는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분명한 것은 예전에 가졌던 민중에 대한 생각, 그러한 생각과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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