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직장이 7곳?...만능 '가사도우미', 그녀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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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봉사왕 63살 가사도우미 이금자씨의 24시
"장애 5급? 내겐 문제 없어...난 청춘이 부럽지 않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설움의 날 견디면 머잖아 기쁨의 날 오리니"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한 구절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던 환갑의 가사도우미는 초등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봤던 이 시구가 늘 머릿속에 맴돈다고 한다.

어렸을 적 불의의 사고로 일찍이 장애(5급)를 마주한 이금자 씨(63. 제주시)의 말이다. 이 씨가 '기쁨의 날'을 기다린 지 어언 50년. 이제 그녀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지난 날 치열했던 인생길을 회고했다.

그러나 이금자 씨의 일상에는 변함이 없다. 새벽 같이 일어나 하루 종일 계단 청소에 설거지, 반찬 배달까지 하고 난 후 밤늦은 10시께나 집에 돌아오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여한이 없다는 말은 이 씨가 이런 고된 일상마저 즐기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금자 씨는 장애에 대한 편견 없이 격려해주는 많은 이들 덕분에 오늘도 행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좋은 사회가 좋은 사람을 만들어 낸다'던 그녀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에 대한 봉사활동에도 여념이 없다.

이금자 씨.<헤드라인제주>

"우리 8남매 중 막내가 내 딸보다 한 살 밑이야. 내가 거의 엄마 역할을 했지. 큰 딸이라서 그랬는지 학교도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어. 어릴 땐 팔에 장애가 있어서 놀림도 많이 받았는데, 선생님들께서 많이 도와주셨던 기억이 나.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까"

서귀포시 동홍동 출신의 이금자 씨는 8남매 대가족의 큰 딸로 태어났다. 대가족이라 함은 8남매 중 막내가 이금자 씨의 딸 보다 한 살 어릴 정도다.

많은 식구 수에 어린 동생들, 좋지 않았던 집안형편까지. 이금자 씨는 어머니의 권유로 초등학교 밖에 다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공직에, 어머니는 밭일에 나가시면서 집안의 빨래와 청소는 모두 그녀의 몫이었던 것. 그래도 그녀의 헌신 덕분인지 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까지 수월하게 다닐 수 있었다.

이 씨가 장애를 얻게 된 건 세 살 무렵, 겨드랑이 종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난 뒤 회복 과정에서 어깨가 탈골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당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뼈가 잘 붙지 않았던 것이 화근. 이후 이 씨는 오른팔은 거의 쓸 수 없게 됐고, 결국 장애 5급판정을 받았다.

유일하게 오른팔로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일. 항상 교실 뒷편 혼자 앉았던 이금자 씨 옆에는 "글은 오른손으로 써야 한다"고 고집하던 담임 선생님이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함께 적어주셨던 선생님의 은혜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녀는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땐 몰랐는데 사회에 나와보니 장애에 대해선 냉정하더라고. 아픈 사연이 많았지. 세상에 공짜가 없다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이후로 더 열심히 살았지."

결혼 후 딸 넷을 슬하에 두게 된 이금자 씨는 '생활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무일푼으로 제주시로의 이사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시에서의 생활도 그리 녹록지 못했다. 어느 날 밤에는 사라봉 팔각정 밑에서 지내며 '저 불빛에 우리가 들어갈 곳은 없나 보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그래도 이금자 씨는 점점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 씨는 병원장 댁, 동네의원, 공공기관의 가정부, 청소부 역할을 자처하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틈틈히 남는 시간에도 소일거리를 분주히 찾아 다녔다. 새벽이든 식사시간이든 불러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오케이'.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 이금자 씨는 빠듯한 하루 24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쓰게 됐다다고 한다.

이 씨는 예순이 넘은 요즘에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미용실과 면세점 청소를 하고, 오전 10시가 되면 시장을 본 후 집에서 반찬을 만든다. 오후 4시에는 영어학원 청소를, 저녁 7시가 되면 미용실 4군데를 돌며 낮에 만든 반찬을 넣고, 청소를 하다 밤 11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온다. 지난 20년 간 그래 왔다.

"예전에는 여기 월급은 집세, 저기 월급은 공과금 이런 식으로 정하기도 했었어. 돈 버는 데 급급했으니까. 그런데 돌아보면 열심히만 하면 돈은 따라오는 것 같더라고. 나 같은 경우에는 장애가 있는데도 일을 흔쾌히 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어. 이제는 일이 즐겁기만 하지."

"난 청춘이 부럽지 않어. 마음이 여유로운 지금이 정말 좋아. 특히 나처럼 장애가 있는 분들 도와줄 수 있는 여력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나도 예전 담임선생님처럼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모두 꽃 같은 사람들인데 꽃 처럼 살아야하지 않겠어?"

이금자 씨는 한창 일을 시작했던 30대 후반서부터 자원봉사를 결심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관대해지고, 더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자신에게는 친구와 밥 한 끼 할 수 있는 조금의 돈만 있으면 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 씨는 매주 목요일 한 재활의료시설을 찾아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돕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지체장애 아동들이 모여 있는 시설이나 양로원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했었다. 오랜 기간 활동을 해 온 터라 도지사상부터 시장상, 복지관장상 등 여기저기서 받은 상장도 여러개.

'좋은 사회가 좋은 사람을 만들어 낸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는 소외이웃에겐 조건 없는 격려가 큰 용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몸이 불편하다고, 일을 잘 못한다고 치부해버리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하게 된다고.

끝으로 그녀는 모든 이들이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자신 또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아갈 거라고 전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힘들게 잘 살아왔다', '팔 아파도 괜찮게 잘 살았네' 라고 말을 해주면 그게 다 힘이 되더라고.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내가 힘 내서 살았지. 역으로 내 작은 행동 하나로 다른 사람이 힘을 얻게 되면 그것 만큼 뿌듯한 게 어디 있겠어."<헤드라인제주>

<오미란 기자 / 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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