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보는 성(性), 여자가 보는 성(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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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집의 사방팔방] 남녀의 性충동과 도덕

며칠 전 충북 관내 경찰서장이 40대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일고 있다.

해당 경찰은 부적절한 관계는 시인하면서도 강제적인 성폭행은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여자와 남자 사이의 성관계는 해명도 어려울 뿐더러 여자가 주장하면 남자가 아니라고 입증하기(미리 대비를 안 했다면)는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다.

인간의 원초적적인 성충동은 남성들에게만 있는 것인가? 프로이트가 말하는 인간의 성욕은 남녀가 모두 성욕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자만 성폭행의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내가 며칠 전에 읽은 책<헬렌 피셔의 “성의 계약” 박매영 번역,>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지게 된 아주 높은 성 충동 구성 요소 들은 어느 것이든, 번식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몇 백만 년 전의 인류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나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컷이 그러한 성충동을 좋아 했기 때문이다. 암컷의 높은 성 충동은 섹스의 유발 요인이며 성충동을 가진 것이 수컷과 경제상의 결속을 맺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암컷은 힘의 센 수컷에게서 보호와 먹이를 구하며 생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암컷이 보다 많이 살아남고, 보다 많은 새끼를 낳았다. 태어난 새끼들도, 수컷에 의해 보장되는 경제적인 풍요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프로토호미니드(protohominid <인간종류로 변하기 전의 동물> )의 암컷이 지니게 된 놀랄 만한 성충동은 현대 여성들에게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헬렌 피셔의 “성의 계약” 박매영 번역, 1993년 115p>암컷 쪽의 섹스유발요인만이 진화 한 것은 아니다. 암컷이 선택을 통해 수컷 족의 섹스유발 요인도 진화 했다는 말이다. <같은 책p117>헬렌 피셔는 <성의 계약>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진화해오는 과정에서, 성충동이 강하고 성적으로 유능한 암컷과 그렇지 아니한 암컷이 경쟁 관계에 놓였을 경우, 승리를 거둔 쪽은 언제나 전자 쪽이었다. 그 결과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암컷무리들 가운데에서는 성충동이 강하고 성적으로 유능한 개체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 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날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여성들은 모두 다 이런 진화 과정을 자신의 전사(前史)로서 간직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성의 경우는 어떤가? 남성의 경우 역시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은 셈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성과 남성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성적 진화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암컷 쪽이었고, 수컷은 거기에 따라오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피셔의 이런 주장이 정당하다면, 오늘날 인류가 남녀를 불문하고 성적인 면에서 실로 대단한 집념과 소질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걸쳐서 반복되어 온 자연 선택이 과정이 그 배후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진화 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비정산적인 현상, 혹은 병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주장한다.

피셔의 주장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 드릴 경우, 인간의 성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자못 ‘따뜻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걸쳐 반복되어온 자연 선택의 과정이 그 문제의 배후에 갈려 있다는 데야, 그 문제 때문에 울고 웃는 일반보통사람들에 대해서 따뜻한 눈길을 보내지 않고 도대체 어쩔 것이냐 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금방 내가 말한 ‘따뜻함’이란 일체의 방종과 일탈을 제한 없이 허용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사의 모든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이 문제되는 영역에서도 적절하고 합리적인 수준에서의 규율은 당연히 요구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당위적 면제를 충분히 수긍하면서도, 위에서 말한 ‘따뜻함’의 의미를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바로 이처럼 ‘따듯한’ 시선을 가지고 성문제에 접근해 가는 태도야 말로 바람직한 것이고 또 자연스러운 것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피셔의 이론은 인류를 위해 매우 유익한 기여를 행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몇 년 전에 연세대 마광수 교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했던 우리사회의 몇몇 유수한 지식인들은, 얼마나 터무니없이 그릇된 인간이해를 고수 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처럼 그릇된 인간 이해에 ‘도덕’이라는 자목 엄숙한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남들에게까지 두루 강요함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얼마나 잘 못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었는지를 재삼 생각 해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찬집 수필가>

김찬집 수필가 그는...

   
김찬집 수필가.<헤드라인제주>
수필가 김찬집은 평생 공직자의 길을 걷다 명예퇴직 후 2003년 5월 시사문단에 등단하면서 수필집 3권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헤드라인제주에서 고정칼럼을 통해 여성, 건강, 지역 정치, 시대가치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려고 합니다.

칼럼을 통해 독자와 가까이서 소통하고 싶다는 수필가 김찬집의 사방팔방 이야기. 많은 애정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김찬집 객원필진 / 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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