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원통한 일이...국가보훈처 정말 이래도 되나?"
일제 강점기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해 항일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 임도현(任道賢) 선생(1909-1950)의 조카인 임정범씨(58. 탐라중 교사)가 최근 한권의 책을 펴냈다.
제목은 '나에게는 개구리가 없다'.
책의 표지에는 '임도현 항일 비행사'라는 부제와 함께 초가 지붕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사진들이 실려 있다.
표지만 보면 임도현 선생의 항일운동 기록문제를 다루는 책의 제목을 왜 이렇게 붙였을까 다소 의아스럽게 다가온다.
'개구리가 없다'라는 말은 더욱 뜬금없는 느낌이다. 그러나 책의 서두를 살피는 순간 그 궁금증은 금새 풀어진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그가 2011년 임도현 선생의 고향인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본향당 인근 한켠에 건립한 '임도현 자료 기념관' 내부에 큼직하게 써붙여져 있던 문구이기도 했다.
"내 주변에는 법조인도 없고, 근성있는 기자도 없고, 국회의원도 없습니다."
책에서도 별도의 '제목 소개'란을 실고 있다.
조선 영조가 야간 잠행 중 있었던 일화로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탐관오리들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내용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호랑이를 심사위원장으로 한 노래자랑이 있었다. 당연히 자타가 공인하는 '꾀꼬리'가 우승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까마귀'가 연 3년째 우승트로피르를 받아가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사연이 밝혀졌다. 까마귀는 매일 '개구리'를 잡아다가 심사위원장인 호랑이에게 뇌물로 바쳤던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개구리'는 일종의 뇌물 내지 백그라운드를 일컫는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임도현 선생의 항일운동 기록은 임정범씨에 의해 지난 10년에 걸쳐 수없이 정리되고 국가보훈처에 제출되었지만, 독립유공자로 서훈되기 위한 5번의 심사 결과는 모두 '탈락'이었다.
◇ 임도현 선생의 항일운동의 기록 내용은?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책을 통해 임도현 선생의 항일운동 기록 내용을 보면 이렇다.
유족들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임도현 선생은 1931년 일본 도쿄 인근의 다치카와 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훈련을 받다 동료 7명을 포섭해 훈련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다.
그 후 상하이외국어학교와 류저우 육군항공학교, 육.해군대학교 등에서 차례로 수학한 뒤 중위로 임관해 쓰촨(四川)성 중경중앙군사정부 직속부대에 소속돼 장제스를 보좌하며 실전에 참가했다.
만주의 소만 국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오른쪽 눈썹 위 두개골이 부서지는 큰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됐다.
일본에서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으나 1935년 비행 탈출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 대신 가마가제 특공대원으로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쳐 특수임무를 수행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다시 다치카와비행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이후 부상 후유증을 핑계로 비행 대기자 명단에 올려 놓고 있다가 다시 탈출해 고향인 제주도에 들어와 숨어 살던 그는 1936년 5월 검거돼 조선총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소에서 10월형을 선고 받아 목표형무소에서 1937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특히 1932년 상하이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체포돼 전기고문 등 모진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다 풀려났다.
고향 제주에서도 중국으로 빠져나가려다 2차례나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41년에는 마을에서 공출과 징병 거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을 맞아 학교 건립 등의 계몽운동도 벌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50년 41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임도현 선생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이력서.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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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용은 그의 모친이 4.3사건 당시 소개작전으로 집이 모두 불에 탈때 건져낸 장롱 속의 자필 이력서를 통해 확인된 것이다.
이 자필이력서는 1940년 고향으로 돌아와 그가 손수 적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책의 저자이자 임도범 선생의 조카인 임정범씨가 국가기록원에서 얻은 '1936년 5월 조선총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소 재판기록'에서도 이의 내용은 뒷받침된다.
나머지 수료증 등은 4.3당시 모두 불에 타 남아있지 않았다.
◇ 독립운동가 서훈 '탈락'..."개구리 때문? 괘씸죄?"
그러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 위한 행정적 절차는 유족들에게 크나큰 절망만을 주었다.
임정범씨가 처음 국가보훈처를 찾아 독립유공자 서훈 관련 문의를 한 것은 2004년 말.
당시 국가보훈처는 이미 3.1절 기념 독립운동가 선정이 끝났기 때문에, 2005년 초에 다시 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자 2005년 3월쯤 정식으로 신청했다.
하지만 당시 사전 심사자료 검토에서는 임 선생의 이력서 기록 중 1년에 00학교 수료 등의 내용이 여러개 있었던 점에 주목하며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조선총독부의 재판자료 등을 증빙자료로 제출했으나 이 역시 소용이 없었다.
결국 '입증 자료 부족'이란 이유로 첫 고배를 마셨다. 이것이 유족들의 길고 긴 '외로운 투쟁'의 시작이었다.
임정범씨는 이후 중국을 수차례 방문해 백부(임도현 선생)의 기록을 직접 구하러 다녔다. 몽골과 베트남까지도 갔다. 그런 긑에 백부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는 일본 경시청의 비밀문서를 찾아냈다.
우연히 알게 된 중국 류저우신문사 편집장을 통해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류저우 항공학교에 있을 당시 촬영한 백부의 사진도 추가로 확보했다.
그리고는 2008년 재신청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유족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 기대는 산산조각 무너졌다. 객관적 거증자료 미비로 또다시 심사보류된 것이다.
2009년에는 국회 국정감사를 요청하면서 상황이 반전되는 듯 했다. 국회의원 보좌관과 협의를 하던 중, 보훈청에서 그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도 하고 다음에 꼭 서훈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이 즈음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고 떠들썩하게 임도현 선생의 항일운동에 관한 내용을 보도했다.
하지만 다시 자료를 보완해 제출했으나 이번에는 '심사 제외'로 분류됐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청와대 진정, 그리고 지난해 다시 신청됐으나 결과는 역시 '탈락' 소식만 전해져 왔다.
"오죽했으면 '나에게는 개구리가 없다'는 책까지 만들었겠습니까? 2008년과 2009년 심사만 하더라도 그렇죠. 똑같은 자료를 갖고 심사를 했으면서도 심사결과 답으로 2008년에는 '객관적 거증자료 미비'된 것이 왜 2009년에는 '제외'라는 답을 제시하는지...괘씸죄가 아니고서는 이럴수가 있습니까?"
단단히 화가 난 임정범씨는 "국가보훈처는 중국 사이트에서 홍보되고 있는 임도현 비행사를 이유불문하고 2010년 광복절 포상에서 또 '배제(탈락)' 시켰을 뿐만 아니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10년 동안 힘들게 찾은 자료를 제출해도 5번의 심사에서 모두 탈락시키고 지금도 동문서답만 하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기 위해, 또 앞으로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나가기 위해 이번 책을 발간했다고 설명했다.
"국가보훈처가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라며 원통해 하는 그는 임도현 선생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까지 '개구리가 없다'의 진실 알리기를 지속적으로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헤드라인제주>
<윤철수 기자 / 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저까지억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