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속 4.3운동史..."벌써 20년 흘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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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사진' 속 4.3운동史..."벌써 20년 흘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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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작가의 4.3진상규명운동 '흑백사진 증언'
"20년 전 현장사진 기록, '외면하는 것'에 대한 애정"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운동 역사를 '흑백사진'을 통해 재조명한 김기삼 작가(56).

제주4.3평화재단이 4일 제주시 신산공원에 위치한 제주영상위원회 신산갤러리에서 마련한 '사진으로 보는 4.3진상규명운동' 기획 전시전은 김 작가의 '발품'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그는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기 이전인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4.3진상규명 운동 현장을 빠짐없이 다니며 필름에 담았다.

'사진으로 보는 4.3진상규명운동' 사진전. <헤드라인제주>
박희수 제주도의회 의장과 김영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 사진들을 둘러보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사진으로 보는 4.3진상규명운동' 사진전. <헤드라인제주>
사진전 개막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김기삼 작가. <헤드라인제주>
1989년 이후 매해 4월3일이면 제주대학교 진입로에서는 4.3진상규명을 촉구하며 가두진출을 시도하는 학생들과 경찰간의 투석전이 벌어졌다. <사진=김기삼 작가>
1989년 이후 매해 4월3일이면 제주대학교 진입로에서는 4.3진상규명을 촉구하며 가두진출을 시도하는 학생들과 경찰간의 투석전이 벌어졌다. <사진=김기삼 작가>
1989년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린 제41주기 4.3추모제 모습. <사진=김기삼 작가>
1992년 4월3일 제주시 탑동에서 열린 재야단체 및 학생 주도의 제주4.3추모제 모습. <사진=김기삼 작가>

개막식에 맞춰 전시장을 찾은 이들은 저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90년대 4.3 진상규명운동과 관련한 공식 행사 중심으로 진열됐을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사진들이 선보였다. 당시 활동했던 이들도 잊고 있었던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흑백사진 77점.

이는 일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흑백사진으로 보관하고 있는 4.3 현장사진만 1천여장이 넘는다.

그 중 추려내어 대표적 작품들을 전시하게 된 것이다.

사진과 인연을 맺은 1976년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면서라고 했다. 그곳에서 그는 고향을 그리워 하며 사는 재일 제주인 1세대와 2세대를 수없이 만났고, 그들을 필름에 담았다.

1985년 귀국한 후에는 재일 제주인들의 삶을 담은 사진들을 정리해 놓았고, 그 결과로 1992년 '달 보멍 하영 울었주' 주제의 첫 사진집과 전시전을 갖게 됐다.

4.3 진상규명 운동 사진을 처음 찍기 시작한 것은 1989년.

이 때는 제주4.3연구소가 창립하던 해다. 그도 연구소 창립당시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것이 인연이 됐다.

그해 '4.3장정' 책자를 만들기 위해 유적지 탐사를 할 때 함께 다니며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더도 제주4.3은 암울한 시기였다.

불과 2년전인 1987년에는 제주대학교에서 당시 송영란 총여학생회장이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의 일명 '4.3대자보'를 붙였다가 안기부에 연행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만큼 4.3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9년은 4.3 진상규명 운동의 본격적 물꼬가 트이는 시기라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전 도록의 부록에 실려있는 강덕환씨(현 제주도의회 정책자문위원)의 <제주4.3, '알림'과 '밝힘'의 궤적'>에서도 "1989년은 4.3진상규명에 대한 대중적 운동의 원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4.3연구소가 창립한 것 뿐만 아니라 제주도내 11개 재야 및 사회단체가 공동으로 41주기 4.3추모제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처음으로 제주시민회관에서 추모제 및 진상촉구대회를 열렸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스러운 접근'이 용인됐던 것도 아니다. 공안당국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가 이뤄졌다.

김기삼 작가 역시 그해 4.3 현장답사가 매우 어렵게 이뤄졌음을 회고했다.

"사진을 찍는 것도 대놓고 하기 어려웠죠. 유적지 답사를 다니면서도 4.3에 대해 접근하기가 어려웠죠. 당(堂)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할머니들로부터 옛날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4.3 얘기가 나왔어요. 그런 방법으로 채록과 사진촬영이 이뤄졌어요."

김기삼 작가. <헤드라인제주>

그해부터 그는 4.3과 관련한 일이 있는 곳이라면 빠지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한 대학가의 현장에도 그는 나타났다. 이번 전시회 동선이 첫 부분에 배치된 대학가 사진들이 바로 그것이다.

1989년 제주대학교에서 4.3을 맞아 가두집회를 갖기 위해 대학 진입로를 나서던 중 경찰이 진압에 나서면서 투석전이 벌어졌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했는데, 이 상황들이 모두 기록사진으로 남겨졌다.

1990년, 1991년의 대치상황, 이어 1992년 제주시 탑동매립지에서 처음 가진 공개된 장소에서의 추모제 등도 모두 채록됐다.

전시회의 사진 77점 중 절반 이상이 이 암울한 시기의 흑백사진들이다.

유적지 답사나 학술제, 해원굿 등도 사진에 담겨졌다.

1990년부터 이념적 논쟁으로 두곳에서 봉행되던 위령제가 1994년 한곳에서 통합 봉행하게 된 과정도 사진으로 엮어졌다.

제주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제주도의회가 전국 순회 홍보에 나섰던 1999년, 그리고 그해 정기국회에서 마침내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자축연이 열렸던 모습까지 기록한 이번 사진전은 지난 4.3진상규명운동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줬다.

김기삼 작가. <헤드라인제주>
4.3 현장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두번이나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는 김 작가는 "당시만 해도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섬증이 일거나 자기검열에 빠지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햇수로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 현장에 있었고, 왜 그 피사체에 카메라 앵글을 맞췄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남들이 외면하는 것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김 작가는 "20여년간 찍은 1000여장의 사진들을 들추고 추려내어 선보이면서 좀더 치열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있으나, 우리가 영원히 접할 수 없는 4.3의 현장들을 더듬어 볼 수 있음을 위안으로 삼는다"고 피력했다.

그는 "제주4.3의 문제해결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면서 앞으로도 4.3현장의 사진 채록에 나설 뜻을 밝혔다.

전시회장을 찾은 박희수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장은 "김 작가의 이 사진들은 제주4.3史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전제, "20여년의 4.3진상규명운동을 사진으로 정리해 낸 일은 매우 값진 일"이라며 격려했다.

김영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돌이켜보면 4.3진상규명운동 과정은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었기에 모두 함께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여기에 수록된 지난날의 사진들이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보듬은 초심의 불씨를 되살리고, 미래세대와의 소통은 물론 4.3을 내외에 널리 알리는 소중한 자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제주시 구좌읍 출신의 김 작가는 현재 제주도의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사단법인 제주민족예술인총연합과 사단법인 탐라사진작가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윤철수 기자 / 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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