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학생'된 70살 할머니, "이제 시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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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학생'된 70살 할머니, "이제 시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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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고입검정 '최고령' 송은정 할머니의 '새로운 도전'
동려학교 입학..."60년만에 잡은 책, 어렵지만 즐거워요"

6.25사변이 휩쓸고 지나간 제주의 작은 마을, 조천읍 신촌리. 전쟁통에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초등학교를 마주한 꼬마아이는 울컥, 울음을 삼키고 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 후 어느덧 60여년. 책가방을 손에 쥐던 고사리손에는 굳은살이, 학교를 뒤로하며 눈물짓던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꼬마아이는 60여년이라는 질곡의 세월을 거치며 70세 할머니가 됐다.

황혼의 문턱을 넘기며, 미처 넘기지 못했던 학교의 문턱. 결국 그녀는 다시 ‘학생’이 됐다.

올해 고입 검정고시에 최고령으로 합격한 송은정(70. 애월읍 구엄리)씨.<헤드라인제주>
주인공은 올해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를 최고령으로 합격한 송은정 할머니(70.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늦은 나이에 다시금 공부의 길로 접어든 그녀의 삶을 듣기 위해 제주동려평생학교를 찾았다.

 # 가족 위해 한평생 바친 삶... “그래도 공부의 꿈 놓은 적 없어요”

송은정씨는 늦은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된 것이 쑥스러운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70세라고는 결코 믿기지 않는,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의 수줍은 미소가 70세의 나이를 모두 커버했지만, 손끝의 굳은살은 그가 거쳐 온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공부대신 궂은일을 도맡아 해야 했던 그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손끝에 눌러앉은 것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는 신촌리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에만 매진하던 소녀였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학교를 보고 망연자실했었죠. 전쟁통에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이라지만, 공부를 못하게 된 애석함이 계속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어요. 그 이후로 한순간도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6.25 전쟁 이후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시집간 친언니의 집에 동생들과 함께 얹혀살게 됐다. 어머니는 삶의 무게에 치여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아버지는 일을 하다 한쪽 눈을 다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셨기 때문이다.

그는 15살의 어린 나이로 가장의 역할을 도맡게 됐다. 밖에서 돈을 벌어와 언니에게 생활비로 주고, 어린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며 10대 시절을 고스란히 보냈다. 얹혀사는 입장에서 공부를 시켜달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20대 후반 무렵에는 결혼을 하고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어머니로 삶을 보냈다.

“지금 아들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딸은 서울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공부하면서 강사로 일하고 있어요. 두 아이를 이만큼 키우고 나서야, 어린 시절 못 다한 공부의 꿈을 다시 키우게 됐죠.”

# 고입검정 최고령 합격....60여년만에 다시 잡은 책, “어렵지만 즐거워요!”

그는 올해 2월 제주동려평생학교에 입학해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60여년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탓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열심히 공부했다.

“나이가 드니까, 돌아서면 배운 걸 잊어버리곤 해요. 그래도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공부하는 재미에, 같은반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시간 가는줄 모르고 학교를 다녔어요.”

지난 4월 검정고시에서 사회와 도덕과목을 합격하고, 지난 8월 검정고시에서 나머지 4개 과목을 모두 합격하며 고입 검정고시에 최종 합격하게 됐다.

2월에 동려학교에 입학한 이후 6개월만에 이뤄낸 성과다. 통상 2년~5년가량 걸리는 고입 검정고시를 6개월만에 초고속으로 마친 것은 동려학교 선생님들과 그의 열정이 함께 빚어낸 결과였다.

“8월 시험을 앞두고, 5월말에는 고관절이 다쳐서 수술을 받기도 했어요. 한창 공부해야할 중요한 시기에 학교에 못나오게 되니 독학으로 공부를 이어갔어요. 그 이후에는 목발을 집고서 학교에 나왔죠. 공부에 목말랐던 만큼, 정말 지독하게 공부했습니다.”

올해 고입 검정고시에 최고령으로 합격한 송은정(70. 애월읍 구엄리)씨.<헤드라인제주>

# "대학 입학이 목표...배움의 즐거움 계속 이어 갈래요”

요즘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진 송 할머니는 앞으로도 배움의 즐거움을 이어나가는 것이 꿈이다. 공부를 하면 무슨일을 하든 더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많아야, 무슨일을 하든 더 넓은 시각으로 볼 수 있어요. 같은일을 하더라도 공부를 하면 더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이어나갈 거에요.”

이번에는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도전하기 위해 동려학교에서 공부를 지속할 계획이다.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대학 진학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고졸 검정고시를 합격하기 위해 앞으로 2년은 더 공부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어요. 합격하면 대학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아직 생각해둔 학과는 없지만, 대학에서 공부할 생각만으로도 설렙니다”

역경의 삶을 살며 60여년간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끝내 마음속에 담아뒀던 열정을 피워내고 있는 송할머니. 고된 삶의 흔적이었던 그의 손끝 굳은살이, 이제 연필을 잡은 흔적으로 바뀌고 있다.<헤드라인제주>

송은정씨가 제주동려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올해 고입 검정고시에 최고령으로 합격한 송은정(70. 애월읍 구엄리)씨.<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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