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25주년, "이젠 사회경제 민주화에 나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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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5주년, "이젠 사회경제 민주화에 나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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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6월항쟁사업회, 6월항쟁 25주년 기념식

"서귀포 아름다운 강정마을에
위선의 탈을 쓴 해군기지 건설 공사가 강행되고
농촌은 한미FTA로 깊은 수렁 속에 빠지고
신자유주의로 노숙자는 거리를 방황하고
인권유린에 내몰린 가엾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오늘 밤에도 밤 하늘의 별처럼 반짝입니다.

아 아 그렇군요
그해 유월 그날의 열정과 함성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그날의 뜨겁고 순결하던 열망은
벌서 싸늘한 재처럼 식어버렸나"
차디찬 절망의 얼음덩이가 되었나
아니면 아직까지 오지 않은 기차
아직까지 오지 않은 혁명의 숨소리
그 피 토하는 상처의 흔적들을 더 기다려야 하는가"

- 6월항쟁 25주년을 맞이하며 中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의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던 1987년 6월.

국토최남단인 서귀포시에서 '대통령을 내 손으로'라는 현수막을 앞세운 대규모 거리시위가 있었다. 민주주의를 갈구하던 그들은 경찰의 삼엄한 원천봉쇄망을 뚫고 시민항쟁을 이끌어냈다.

서귀포에서의 항쟁은 서울에서 촉발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국토 최남단에서도 벌어졌다는 점, 그리고 '학생' 중심이 아니라 '청년'이 주도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했다.

'독재타도'의 함성으로 그해 여름을 뜨겁게 달군 서귀포항쟁은 6월항쟁이 제주에서, 그리고 국토 최남단인 서귀포에서까지 촉발되면서 마침내 독재정권으로 하여금 무릎을 끓게 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0일 오후 6시, 서귀포시 오일시장 입구 칠십리악단 사무실에서는 '6월항쟁 2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동안 해마다 서귀포 자체 기념행사로 가져오던 것을, 이날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후원으로 전국 동시 행사로 마련됐다.
 

서귀포6월항쟁정신계승사업회 등이 주최한 '6월항쟁 25주년 기념식'. <헤드라인제주>
서귀포6월항쟁정신계승사업회 등이 주최한 '6월항쟁 25주년 기념식'. <헤드라인제주>
서귀포6월항쟁정신계승사업회의 이영일 회장. <헤드라인제주>
서귀포6월항쟁정신계승사업회 등이 주최한 '6월항쟁 25주년 기념식'. <헤드라인제주>
이 자리에는 당시 서귀포YMCA와 야학에 참여해 활동하다 서귀포항쟁을 주도했던 이영일, 강방수, 진희종 등을 비롯해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이석문 교육의원과 김용범 의원, 그리고 시민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전국적으로 6월항쟁 기념행사에서 펼쳐지는 오방색 종이비행이 날리기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시민연대 홍창희 사무국장의 '6월 민주항쟁 25주년을 맞이하며'라는 시낭송, 문화행사 등으로 이어졌다.

이어 전국적으로 채택된 '6월항쟁 25주년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이영일 회장이 낭독한 선언문에서 6월항쟁 25주년행사 국민추진위원회 "25년전 우리는 국민의 단결된 힘으로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향한 거대한 행진을 시작했다"며 "6월항쟁은 비단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민주항쟁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민주화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길이 기억될 사건이 되었다"고 회고하고, 앞으로 사회운동방향을 제시했다.

국민추진위는 우선 "6월항쟁으로 이룩한 정치적 민주화를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민주주의는 정치영역에서 시작되지만 국민들의 구체적인 삶과 직결된 경제적 민주화와 사회적 민주화를 통해서 완성된다"며 "재벌의 과도한 경제적 지배를 해소하고 노동정의를 실현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실현되고 원활하게 작동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과거의 낡은 관행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참여하고 모든 국민이 함께 행복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소수 1%를 위한 특권주의를 배격하고 모든 국민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밝혔다.

선언문 낭독에 이어 참가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제주해군기지 문제 등 제주현안에 적극 나설 것을 결의했다.

이영일 회장은 "오늘 행사는 25년 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졌던 6월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지역사회의 화합과 발전동력을 확보하자는데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오는 24일에는 시민 족구대회 및 어린이 사생대회 등의 행사가 열린다. <헤드라인제주>

시낭송을 하는 서귀포시민연대의 홍창희 사무국장. <헤드라인제주>
서귀포6월항쟁정신계승사업회 등이 주최한 '6월항쟁 25주년 기념식'. <헤드라인제주>
서귀포6월항쟁정신계승사업회 등이 주최한 '6월항쟁 25주년 기념식'. <헤드라인제주>

1987년 6월항쟁 당시 서귀포시지역에서의 민주화항쟁 가두시위 모습. <헤드라인제주>
1987년 6월항쟁 당시 서귀포시지역에서의 민주화항쟁 가두시위 모습. <헤드라인제주>
가두행진을 마친 후 매일시장 입구에서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하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1987년 6월항쟁 당시 가두행진을 마치고 놀이터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경찰이 한 시민을 애워싸 체포하려 하는 모습. <헤드라인제주>

1987년 6월, 서귀포시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한 '호헌철폐'과 '독재타도'의 함성이 연일 전국적으로 울려퍼지고 있는 가운데, 1987년 6월26일에는 전국 37개 시.도에서 일제히 '평화대행진'이 열렸다.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서도 수백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제주에서도 어림잡아 1만명 이상은 거리로 나와 한 목소리로 정권을 규탄했다. 이날 경찰에 연행된 사람만 전국적으로 3400여명(당시 치안본부 발표 숫자)에 달했다.

이 속에 서귀포시가 있었다. 서귀포시 시위계획은 3일 전에 급조되다시피 해서 계획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생과 시민들이 제주시로 집중해 시위가 전개되고 있을 6월23일 밤.

서귀포YMCA 건물 2층에서는 청년 10여명이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전국적인 평화대행진이 열리는 6월26일 오후 6시 서귀포시에서도 시민항쟁을 이끌어내자는 결의가 모아진다. 그리고 구체적인 역할분담이 이뤄진다.

서귀포시위 계획 및 실행은 전적으로 '청년'이 중심에 서 있었다. 서귀포YMCA 청년연맹(당시 회장 이영일, 당시 인하공대 졸업후 제주에 내려와 청년운동 중)과 서귀포민주청년회(회장 윤춘광, 당시 신민당 산남지역 담당 조직부장) 소속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중 서귀포YMCA청년연맹에는 당시 소그룹이 매우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민속문화연구회 '디딜팡', 여성모임인 '한빛', 연극모임인 '새왓', 그리고 묵향회, 독서클럽 등의 소모임이 그것이다.

디딜팡에는 김창수(당시 제주대 중퇴)가 회장을 맡고 있었고, 강방수(당시 제주대 갓 졸업), 오영근(당시 제주대 재학 중)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여성모임인 한빛에는 김경희(당시 제주대 갓 졸업)가 회장으로, 김미리(현 정당인)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연극모임 새왓의 회장은 김성한이었다. 독서클럽에는 오윤태(당시 부산대 졸업하고 KT에 재직 중)가 맡고 있었다. 소모임에는 전체적으로 60-7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중 20명 정도는 사회과학 이념학습을 통해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실천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서귀포민주청년회는 현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인 윤춘광 회장을 중심으로 15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중 10명 정도는 사회문제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윤춘광은 6월10일 제주대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시국대토론회에서 연사로 나설 만큼 반독재 및 직선제 개헌에 대한 열정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

어쨌든 서귀포YMCA 청년연맹과 서귀포민주청년회 소속 청년들이 주축이 된 23일 모임에서는, 6월26일 오후 6시 서귀포시 매일시장 옆에 위치해 있었던 천주교 복자교회(현 아케이드공영주차장 부지) 앞 놀이터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된다.

처음 계획할 때에는 이영일, 강방수, 김창수, 김성한, 김두옥(당시 군복무를 막 끝낸 무렵), 강현철(당시 동의대 휴학), 진희종(5.18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청 사수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피검돼 투옥됐다가 출소, 전남대 제적) 등 7명이 '디머'(주동자)로 나서기로 한다.

여기에 서귀포민주청년회의 윤춘광은 유인물을 제작해 서귀포시 시내 곳곳에 배포하는 일명 '피셀' 책임자로, 그리고 김경희와 김미리는 시위를 준비하고 디머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 받는 비선역할을 맡는다.

오윤태의 경우 시위준비 과정과 당일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나, 회사원인 관계로 '디머'에서는 제외됐다. 오윤태는 당시 KT 신입사원이었다. 이 부분과 관련해, 그는 6월26일 당일 집회가 시작되자 마자 제일 먼저 울타리를 넘으며 '용감한 행동'을 하다가, 직원들에 의해 회사로 붙들려 가서 시말서를 썼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1986년 11월 제주대 총장실 점거사태로 제명처분을 받음과 동시에 경찰에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경호, 현맹수의 경우에도 핵심적 역할을 맡아 준비를 같이했으나 집행유예기간인 점 등을 고려해 당시 동료들이 '디머'로는 나서지는 못하도록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서귀포시에서 봉기해야 전국민적 항쟁이 되는 것 아닌가"

'거사' 3일전에 급하게 계획된 시위였지만, 이들의 준비는 매우 철두철미하게 이뤄졌다. 모든 것이 '군사 1급기밀' 이상으로 철저히 보안이 유지됐다.

이영일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6월26일 전국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제주시 지역이 어느정도 성공했는데, 서귀포시에서도 하면 상당히 의미가 있겠다. 첫째 최남단 도시라는 점, 둘째 대학도 없는 도시에서 청년과 시민들이 봉기를 한다면 그야말로 전국민적 항쟁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청년조직의 공감을 얻었다. 그런데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귀포시에는 대학이 없어 거주하는 대학생들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적은 인력으로 어떻게 시위를 조직할 것인가, 이 부분에서 고민에 빠졌다."

적은 인력으로 집회를 하다가는 자칫 조기진압될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정된 시위장소가 바로 서귀포 매일시장 옆 복자성당 앞 놀이터다.

매일시장에는 언제나 사람이 북적거려서 시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고, 경찰이 진압해 들어오면 성당안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점 등이 모두 고려된 것이었다. 당시 놀이터 둘레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때 이들을 돕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복자성당의 한 수녀였다. 외소한 체격의 그 수녀는 이들 청년에게 성당내에서 집회는 못하지만 그 집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모든 일이 착착 잘 풀리고 있었다.

문제는 집회현장에 시민들을 어떻게 불러모으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진희종은 6월24일 제주시에서 열린 집회가 끝난 후 당시 제주대 학생운동권의 지도부격인 정원태(당시 제주대 사학과 2학년 재학 중, 학습소그룹인 소위 '언더'진영의 지도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를 만나 이 부분을 논의한다.

제주시에서 집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징적 의미 차원에서 서귀포시에서도 하겠다는 말을 전해들은 정원태는 "사람이 얼마 없는데 가능하겠느냐"며 걱정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집회 시간에 맞춰 '전투력'있는 학생 20여명을 보내겠다고 약속한다.

#시내에 뿌려진 유인물...발칵 뒤집힌 경찰

제주시쪽에서 20여명을 '파병'받게 됐지만, 시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뚜렷한 묘책은 없었다. 그래서 집회 하루전인 6월25일에는 대대적인 집회홍보에 나서기로 했다.

집회시간과 장소를 명확히 공고한 유인물을 대량으로 만들어 서귀포시내 골목골목과 심지어 고등학교 게시판까지 모두 부착하기로 했다. 이 역할은 윤춘광 회장이 중심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직접 유인물을 배포했던 윤춘광씨의 얘기다.

"그때 제가 80CC 오토바이가 있었는데, 디머 중 한명인 강방수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온 종일 서귀포시내를 돌아다녔어요. 골목골목 안다닌데가 없을 정도로, 유인물을 듬뿍 실어안고서 곳곳에 뿌려댔죠. 어느 고등학교에 들어가 벽보판에도 붙였어요. 유인물을 뿌리면서 시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이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었음을 알 수 있었어요. '그 놈들(전두환 정권)은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집회의 성공을 예감했어요."

이 유인물이 살포되면서 서귀포경찰서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미 집회시간과 장소가 공개된 터라 서귀포에서까지 시위를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서귀포경찰서 입장에서는 질책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곧바로 5.16도로와 시내 곳곳에 경찰을 배치시켜 불심검문을 했다. 주동자들을 색출해서 사전 연행하기 위해서다.

서귀포시에서도 집회를 한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경찰이 주동자 검거를 위해 다급하게 움직이자 이영일과 진희종, 강방수, 김창수, 강현철, 김성한, 김두옥은 복자성당 지하실로 꽁꽁 숨어버렸다.

복자성당 지하 은신은 성당 수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컸다. 그 수녀는 이들을 지하실에 은신시켜준 후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집회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었다.

이영일씨의 얘기다.

"그 수녀님이 어찌나 정성스럽게 우리를 돕던지, 우리가 정말 미안해할 정도였어요. 뿐만 아니라, 집회 당일 오후 6시에 맞춰 울리는 '삼종'(성당에서 하루 3번, 3회씩 종을 울리는 것을 말함) 때, 시민들에게 보다 알리기 위해 종을 세번만 치지 않고 10분정도 울려주겠다고 하셨어요. 우린 너무 고마웠죠. 신부님도 아마 이러한 분위기를 모두 감지하셨을 거예요. 마음 속으로 우리를 지지해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셨던 거예요."

#집회 당일 2명 경찰에 연행...다가오는 시간

집회가 예정된 6월26일 새벽.

그런데 이날 새벽 성당에 은신 중인 '디머' 중 이영일 강방수 김창수 3명이 몰래 성당을 빠져나갔다가 이중 강방수와 김창수가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치명적인 인력 손실이었다.

이영일씨가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한다.

"새벽에 우리 3명이 성당을 빠져나갔다. 오후 6시 집회를 하려면 유인물이 필요했는데, 서귀포YMCA 건물 2층 정문 출입문은 잠근채로 그냥 두고 뒷문을 이용해서 들어가 유인물 작업을 하려 했다. 2층에 몰래 잠입해 야외에 나갈 때 쓰려고 남겨뒀던 식용유를 이용해 희미한 불을 켠 후 '가리방'으로 긁어놓은 것을 갖고 등사기로 유인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없어 경찰 4-5명 쯤이 들이닥쳤다. 이들도 역시 뒷문으로 들어왔다. 그때 김창수가 정보계장인가 하는 사람의 복부를 발로 차 버렸다. 그러자 경찰이 김창수만 집중적으로 달려들어 잡으려고 했다.
김창수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싸우는 사이 저와 강방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성격이 워낙 꼼꼼한 강방수가 경찰이 김창수를 연행한 후 돌아갔을 것으로 생각하고 서귀포YMCA에 다시 들어갔다. 뒷정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마침 다시 돌아온 경찰에 붙잡히게 된 것이다."

2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가자 성당 지하실 분위기는 다소 침체됐다. 하지만, 집회를 반드시 성공적으로 치러내겠다는 의지는 매우 결연했다. 성당 지하실에 모여있는 디머들은 오후 6시까지 누구도 꼼짝하지 않고 은신했다. 밖으로 나갔다가는 바로 잠복중인 경찰에 노출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집회시간이 다가오자 경찰은 전경들을 집회장소인 놀이터 울타리 주변을 빙 둘러싸는 형태로 원천봉쇄에 들어갔다. 다만 울타리에 이웃한 성당건물 부분만 경찰의 봉쇄가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은 매일시장 쪽에서 주동자들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당 지하실에 이들이 숨어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기다림에 지친 윤춘광씨 "민주주의 만세!"

드디어 예정된 시간인 오후 6시.

복자성당에서는 삼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삼종은 '규정대로' 울리지 않고 계속해서 울리는 것이었다. 이곳 수녀가 집회가 시작된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10여분간 계속해서 울려댔다.

삼종이 울리기 시작한지 1-2분여가 지났을까.

집회가 예고된 어린이놀이터 바깥상황은 술렁거림이 있었다.

집회시간이 되어도 '디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봉쇄된 울타리 너머에서 삼삼오오 모여있던 시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이미 수백명의 시민들이 산발적으로 운집해 있었다. 그 중에는 제주대 총학생회로부터 '지원 명령'을 받은 이법정 기획부장과 운동권 학생 20여명도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다.

경찰도 잔뜩 긴장해 있었다. 특히 이곳에 출동한 전경들은 일반적인 진압전경이 아니라 해안가 경비근무를 하는 전경들이었다. 이들은 복장에서부터 일반전경과 달랐다. 진압용 헬맷과 방패가 아니라, 얼룩무늬 군인철모와 진압봉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잘 모르는 시민들의 경우 전경이 아니라 군인이 투입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여튼 삼종이 울리기 시작한지 1-2분이 지났으나 집회를 할 분위기가 보이지 않자 일부 시민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종소리와 함께 정적이 감돌 정도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을 무렵, 한 시민이 큰 목소리로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두 팔을 들며 '민주주의 만세!'를 연거푸 외치는 이 시민은 다름아닌 윤춘광씨였다. 그는 '디머'들이 경찰의 봉쇄 때문에 이곳에 오지 못하게 된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 군중들을 선동하기로 마음먹고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윤춘광씨의 얘기다.

"약속시간이 6시로 되어 있었는데, 1분이 마치 1시간 처럼 느껴졌어요. 삼종이 울리는데 주동자들이 보이지 않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어요. 무산된 것으로 생각한거죠. 그래서 제가 뛰쳐 나갔는데, 생각나는 마땅한 구호도 없고, 그때는 그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 같아서 '민주주의 만세'를 크게 외쳤어요."

그가 '민주주의 만세!'를 외쳐대자 사복형사 한명이 '저 놈 잡아!'라고 지시했고, 순식간에 경찰이 달려들어 그의 양 팔과 양 다리를 들고 경찰차에 싣고 곧바로 연행해 가 버렸다.

#삼종 울리기 시작하자, "드디어 때가 됐다"

그러자 그곳에 운집해 난생처음 서귀포시에서의 시위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시위가 이걸로 끝나는 것이구나'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 시각, 봉쇄된 놀이터울타리 서쪽 방면의 복자성당 계단을 통해 이영일, 진희종, 강현철, 김성한, 김두옥 등 5명이 태극기와 핸드마이크, 북, 꾕과리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곧바로 봉쇄된 놀이터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개선장군 같은 그들의 모습에 시민들은 울타리 외곽으로 순식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왜 시간이 약간 지체되었을까. 이영일씨의 전해주는 상황은 이렇다. 삼종이 울리기 시작하자 이들은 '드디어 때가 됐다'며 성당 지하실 계단 위에 모여 섰다. 그리고는 '출정가'를 작고 굵은 목소리로 불렀다.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 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 무엇이 두려우랴 / 출정하여라 / 영원한 민주화행진을 위해 /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이영일씨는 당시 '출정가'를 부르던 순간의 감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삼종이 울리기 시작하자 은신해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가자고 하며 지하실 계단에 서서 '출정가'를 불렀다. 노래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작고 강하게 불렀다. 그 노래를 부를 때 가슴이 정말 벅차 올랐다.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성당과 놀이터 경계 울타리에 올라선 이들은 경찰에 포위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시민들은 울타리 밖에 있었고, 전경들이 놀이터 울타리를 빙 둘러싸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놀이터 안에서의 집회는 불가능했다.

이영일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모입시다!"

그렇지만 울타리 밖 시민들은 경찰력에 가로막혀 울타리 내부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영일은 "여러분 모입시다! 우리 힘으로 독재정권을 끝장냅시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구경하던 시민들이 울타리 내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자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며 진희종씨를 선두로 해 군중들이 있는 속으로 들어갔다. 이영일은 집회대오가 형성될 때까지 혼자 경찰을 제지하며 격렬히 항거했다.

경찰이 이영일에게 집중돼 옥신각신하는 사이, 오윤태도 울타리를 넘었다. 그러나 그는 소속된 KT직원들에게 끌려가 버렸다. 큰 체격의 진희종은 울타리를 넘자마자 시민들을 선동했고, 그러자 바로 대오가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멈칫거리던 시민들도 대열에 합세했다. 전세가 완전히 역전돼 있었다. 당황한 경찰은 이영일을 체포하려던 것도 멈추고 자포자기한듯 씩씩거리며 대열에 합류하는 이영일을 그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 출동한 병력만으로는 진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영일씨의 얘기다.

"처음에는 경찰이 우리를 우습게 본 것 같았다. 그저 놀이터 울타리 주변만 잘 원천봉쇄하면 집회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출동한 경찰력도 처음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우리가 성당 지하에 숨어있어 계단위로 나오기만 하면 바로 뜰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을 경찰은 간파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대열에 합류한 인파가 크게 늘어났다. 격분한 시민들은 삽시간에 몰려들었고, 골목길을 빼곡히 매웠다. 그 수는 최소 1000명을 훨씬 넘었다는 것이 당시 현장 참여자들의 얘기다.

진희종씨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시민들을 향해 '민주헌법 쟁취'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앞장서서 매일시장 골목길을 통해 동명백화점 방면으로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시위대의 맨 앞줄에는 '대통령을 내 손으로'라는 상징적 의미의 플래카드가 앞세워졌다.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구호소리는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고, 건물 옥상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이들을 지지했다. 경찰도 저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동명백화점 일대를 돌고 또 돌았다. 서귀포시가 '해방구'로 변해갔다.

이렇게 해서 6월항쟁의 유일한 기록으로 남는 서귀포항쟁은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 집회를 했던 어린이놀이터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경찰력이 크게 보강돼 강경진압을 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놀이터 옆 골목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되고 있었다. 놀이터 주변은 시민들로 빼곡했다. 건물 옥상마다에도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다. 인파는 시간이 갈 수록 크게 늘었다.

그러자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제일 먼저 선두에 서 있었던 진희종을 고립시키듯 포위해서 연행했다. 그리고는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시위대는 복자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곧바로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영일과 이대원 복자성당 신부가 서귀포경찰서를 찾아가서 강력히 항의했다.

경찰은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이미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10여일에 걸쳐 계속되고 있었고, 제주시에서도 연일 대규모 시위가 열리고 있었던 터라, 연행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부 지시'만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이대원 신부는 이영일과 함께 연행자를 석방할 것을 경찰에 강력히 촉구했다.

이윽고 밤 11시쯤, 경찰은 진희종, 강방수, 김창수, 윤춘광 등 연행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복자성당 농성장에서는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그로부터 3일 후, 6.29선언이 발표됐다. 대한민국 최남단 도시인 서귀포에서의 이날 항쟁은 군사독재정권의 종지부를 찍는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국 16개 시.도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대규모 시위가 열리던 날이었지만, 서귀포에서의 시민항쟁 참여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었다. <헤드라인제주>

*이 글은 <제주민주화운동사-타는 목마름으로>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윤철수 기자 / 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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