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딴따라의 길'..."우리가 얼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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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딴따라의 길'..."우리가 얼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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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훈 시인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 <52> 500g의 전설

고운 얼굴, 슬픈 얼굴, 기쁜 얼굴, 미운 얼굴
허기진 모습, 배부른 모습, 추운 모습, 더운 모습
짜증난 표정, 애매한 표정, 자신 있고 없는 표정
온갖 얼굴 다 가질 수 있는
우리가 얼짱이다

몸을 단련해 힘을 축적하고
몸을 움직여 예술을 일궈내는 광대
온 몸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온 몸을 내던져 해방을 만끽하며
몸뚱어리 하나로
세상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우리가 몸짱이다

몸의 언어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마음
약한 자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강한 자 횡포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
그 마음 변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넉넉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맘짱이다

광대가 얼짱이다
민족광대가 몸짱이다
민중광대가 맘짱이다
우리가 짱이다
- 장윤식의 시, 「우리가 짱이다」 전문

이렇게 얼짱이요, 몸짱이며, 맘짱인 광대들!
오늘은 그 광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중에서도 저가 몸담고 있는 제주 <놀이패 한라산>의 초창기 시절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저가 ‘한라산에 입산’(놀이패 한라산의 단원이 된다는 말입니다)한지도 이제 햇수로 스물네 해가 됩니다. 1987년에 창립할 때부터 시작했으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풍물 가락 하나, 소리 한 소절, 춤 한 동작 제대로 못하면서 광대입네 하고 지내온 세월이긴 합니다만, 그 세월 속에는 남들이 모르는 그야말로 피눈물 한숨이 만신창이로 배어 있습니다.

제주지역의 열악한 문화풍토를 탓하지 않더라도 지역사회의 문제와 왜곡된 역사를 파헤치는 마당극 한 편 올렸을 때, 아니 준비과정부터 따라붙는 정보기관의 감시 그리고 공연 후의 추궁. 창단 이후 몇 년간 계속돼온 엄혹한 정치현실과 마당극에 대한 탄압도 광대들에게는 커다란 어 려움이었고 극단 존립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또 몇 달 연습을 거쳐 공연을 해도 돈이 안 되는 생계의 허덕임은 무엇보다 광대를 힘들게 했다.
- 또 장윤식의 글, 한라일보 「광대의 몸」 중에서

초창기 활동 시기는, 말이 좋아 문화운동이지 거의 룸펜 떨거지 신세들이었습니다. 집에서도 절대 환영을 받지 못하는 ‘신세 조진’ 딴따라 팔자들인지라 또 그걸 핑계로 거의 집에는 안 가든지 못 가든지 했더랬습니다. 여자 회원들은 ‘집안에 딴따라를 둘 수 없다’는 부모들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머리끄덩이 잡혀서 강제로 집에 감금되기도 할 때였습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고 읊조리며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고 하염없이 전상을 떨기도 했습니다. 제사나 명절 때도 그냥 슬쩍 얼굴만 비췄다가 슬그머니 쫓기듯 도망쳐 나오는 그런 나날들었습니다.

어쨌거나 명색이 배우들인지라, 공연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는 근 두 달 이상을 연습을 해야 하는데요. 연습장에 올 차비가 없을 정도로 기근에 시달리던 배우들에게 어느 날부턴가는 기획자가 버스 승차권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게런티’라고 하는 출연료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배우들은 그 승차권을 저당 잡혀 뒷풀이 술자리를 마련해서 미리 다 써버립니다.

‘공연을 잘 하기 위해서는 배우들끼리의 거침없는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뒷풀이를 잘 해야 공연도 잘 하는 법이다!’라는 둥의 감언이설로 공연 때까지 금주 명령을 내린 연출가를 꼬드겨서 같이 마시기도 합니다. 한두 번 마셔버리면 차비가 없어 집에도 못 가니까 그냥 연습실에서 먹고 자고 뒹구는 그런 나날이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지리도 못난 것들이
문화운동을 한답시고 쥐뿔도 가진 것 없이 설쳐대다가
어느 날, 문득 쌀이 바닥나고 라면 하나 살 돈이 떨어졌다
밥솥 바닥에 최소한 3일은 묵었을 시커멓게 눌어붙은 누룽지
한 주전자 가득 물을 넣고 팔팔 끓여 한 술 두 술 먹다가
툭 툭 툭,
눈물이 누룽지탕 속으로 떨어졌다
눈 물 밥,
아니, 밥도 못 되는 그 누룽지탕의 국물만 계속 늘어났다
- 졸시, 「누룽지탕」 전문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 아니 눈물누룽지탕이었습니다. 들어나 보셨습니까? 눈물누룽지탕! 먹어나 보셨습니까? 눈물로 국물을 불린 누룽지탕!

‘지지리도 못난 것들이/ 문화운동을 한답시고 쥐뿔도 가진 것 없이 설쳐대다가’, 이러한 자조 섞 인 대목에서, 나는 그들의 미욱한 행동에 알밤이라도 한데 먹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래 얼마 나 지지리도 못났으면 밥 한 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 따위(?) 일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괜히 부아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러다가도 눈물이 나오고야 만다. (중략) 시지프스가 산정에 커다란 바윗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반복해야 하듯, 그도 자신의 짊어진 죄업(?)으로부터 벗어나기 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무엇보다도 문화운동은 그가 좋아서 하는, 어쩌면 숙명적인 일이 기도 하기 때문에.
- (김광렬, 「힘없고 여린 것들 속에 서서」, 김경훈 시집 <삼돌이네 집> 서평 중에서)

그런 불쌍한 선배 개털광대들을 보다 못한 후배들이 모종의 기가 막힌 제안을 하나 들고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500g의 전설'의 시작입니다. 제사나 명절을 지낸 후 남은 음식을 각자 집에서 한 근씩(그것도 특히 육고기를 중심으로 600g!) 가지고 와서 설운 딴따라들에게 먹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참 닭이 밝았습니다. 대보름달이었으니까요. 지금의 자연사박물관 근처에 연습실이 있을 때인데요. 그 600g을 모아서 술을 마시는데 가슴이 짜안해지고 신세가 처량해져서 눈물에 가린 달이 흐릿하게만 보였더랬습니다. 정원 대보름달은 밝기만 하고 우리의 가슴은 꼭 그만큼한 크기로 뻥 뚫려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길’이라는 노래를 개사한 ‘딴따라의 길’을 비장하고 처절하게 부르며 술잔을 올립니다.

그리운 내 고향 내 부모 떠난 지 언제더냐
그 하 세월에 묻혀 살아온 이 몸은 딴따라로다 허나
주눅들지 마라 외로워도 마라 그 모든 슬픔 털어 버려라
딴따라의 길 참 세상의 길 그 길을 우린 알잖아
가련다 너도 나도 하나 되어 자랑스런 딴따라의 길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고, 고진감래에 새옹지마라 했던가요. 그런 시절이 흐른 후 다들 시집 장가도 가고 저 만씩들 안정을 찾으면서부터는 600g 행사가 더 이상 눈물의 날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한 근을 500g으로 치는 이상한 도량형의 변천에 따라 지금은 ‘500g의 전설’로 정착되었는데요. 매해 설날과 추석 뒷날에는 모두 집에서 준비한 명절 음식을 손에손에 들고 가족들 대동해서 연습실에 모입니다. 윷판도 벌어지고 노래판 춤판도 이어집니다. 연습실이 떠나가라 신나게 한판 만판을 벌입니다. 이런 자리에선, 광대시인인 저가 또 주책같이 나서서 시 한 수 낭송하는 것도 꽤 운치 있지 않겠습니까?

세월아 가지마라
가는 세월 저절로 가지 못하게
열두발 상모끈으로 묶어 신대 끝에 단단히 매달아두고

나라 꼴 더럽게 하는 놈과
집안 꼴 욕되게 하는 놈과
사람 꼴 우습게 하는 놈들
강림이 손에 심겨 좋은 데 먼저 보내버렸으니

나머지 벗님네들 모여 앉아서
한 잔 더 먹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에 광대가 있어 웃음웃을꽃 만발하구나
해동조선 제주섬 예가 바로 서천꽃밭이구나
- 졸시, 「사철광대가」 중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이 좋은 날에 술이 부족해서야 되겠습니까. ‘게민 나가 술을 먹지 술병을 먹을 말이냐!’라고 항변하는 정모 선배를 중심으로 술은 끊임없이 공급됩니다. 어젯밤의 술과 만난 오늘새벽의 술이 저절로 흥취를 더해 갑니다. 아침 해가 빈대떡 같이 떠오를 때까지 ‘딴따라의 길 주인되는 길 그 길을 우린 가련다’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부어라 마셔라 술잔이 오고갑니다.

이렇게 오늘도 여전히 500g의 전설은 쭈욱 이어지고 있다는, 그런 전설 아닌 전설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백대에 인멸치 아니하고 인구에 회자하야 김 아무개라 하는 거리시인의 글에까지 올라 헤드라인제주의 전파를 타고 길이길이 전해지니 그 뒤야 뉘가 알리. 어질더질! <헤드라인제주>

김경훈 시인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는...

   
김경훈 객원필진. <헤드라인제주>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4.3이야기, 현시대의 시사문제, 책을 읽은 후의 느낌, 삶의 의미과 가치에 대한 생각 등을 시(詩)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프로필.

1962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제주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우아한 막창」,「운동부족」, 「한라산의 겨울」, 「고운 아이 다 죽고」,「삼돌이네집」, 「눈물 밥 한숨 잉걸」이 있고 마당극대본집으로 「살짜기옵서예」가 있다. 

제주 4.3 일본어 시집 「불복종의 한라산」도 최근 출간했다. 제주MBC 라디오 제주4.3 드라마 10부작「한라산」을 집필했다.

제주4.3 연구서인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와 「그늘 속의 4.3」, 「무덤에서 살아나온 4.3수형인들」을 공동집필했다. 현재 제주4.3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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