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굽이 떨어지고 앞이 헤진 구두 한 짝.

"퉁, 퉁, 퉁" 일정한 리듬의 망치가 네댓 번 내리쳐지고, 잘 개여진 헝겊이 슥슥 문질러지자 수명이 다 된 듯하던 구두는 흡사 새 구두처럼 탈바꿈했다.

"제주도 어디를 가봐! 이만큼 구두 고칠 수 있는 데가 있나." 제주시 시민회관 인근 큰길가의 한 평 남짓한 작은 구두방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풍경이다.

구두 수선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남해구두'의 하범룡(65)씨는 오늘도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버려질 뻔한 구두들을 맞이한다.

# "딱 보면 알아! 전문가 별거 있나"

30년을 꾸준히 지켜온 작은 구두방. 공간은 좁지만 구두를 닦는 것부터 수선 작업, 심지어 수제화 제작까지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이뤄진다.

"딱 보면 어떻게 고쳐야할지 아는거지. 전문가가 별거 있어?" 대화를 나누면서도 연신 손은 구두굽을 만지작 거린다.

"30년동안 이 자리에 있다보니 이제 '남해구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 저기 성산포나 안덕면에서도 구두를 고치러 찾아온다니까."

제주시내에만 해도 30군데가 넘는 구두 수선집이 있지만 으뜸은 '남해구두'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만큼 단골손님들도 알아서들 찾아온다고 말한 하씨.

과연 그의 말처럼 찾아오는 손님들마다 연신 반가운 기색을 내비친다. "이 앞집 옷가게랑 아는 사람이지? 많이 받을 수 있나 2000원만 줘." 끈 떨어진 가방의 수리비는 고작 천원짜리 두장이었다.

'아내가 목숨처럼 아끼는 것'이라고 당부하며 밑창이 떨어진 운동화를 내민 한 손님. 주로 다루는 것은 구두지만 가방이나 운동화 수선쯤도 그에게는 거뜬하다.

"이 구두는 어디서 산거래? 이런건 두 달이나 세 달밖에 못 신지 않아요?" 기자의 싸구려 구두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이야기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던 구두의 실체가 꿰뚫렸다.

# 새벽녘 가게 앞 청소, 30년간 한번도 거르지 않아

하루종일 쪼그려 앉아야 하는 작업. 힘에 부칠만도 한데 조금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비결이 뭘까.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서 운동을 가요. 저기 공설운동장 있지? 거기 10바퀴 정도 돌고나면 하루가 상쾌해져." 일을 시작한 지난 3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나갔다는 하씨.

"가만히 앉아서 일하다보면 관절염이 생기잖아? 그러니 매일 운동을 해야지. 운동하면 뇌도 맑아지고 눈도 맑아져요. 흰머리도 하나도 안나고."

하루도 거르지 않은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앞길은 항상 내가 청소해요. 우리 가게 입구잖아요. 내가 청소하기 시작하니까 밑으로 이어진 가게들도 다 알아서들 청소를 하더라고."

그런 성실함을 인정받아 제주시나 제주도 등에서 전달한 '시민상' 명목의 상장만 벌써 6개째다. "그래도 나름 착한일하고 좋은일도 하다보니 그런것 같네"

# "아내 생각하면 미안하지...고생을 많이했어"

착하고 성실하게 자란 세 자녀는 그의 자랑거리다. 어느새 대학공부까지 마쳤으니 걱정할 만한 일도 없다.

다만, 아내를 생각하면 항상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는 그였다.

"집에서 혼자 애들 다 키우고, 일까지 다니느라 고생했지. 얼마전에 청소일 하면서 관절염이 생겼는데..."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다.

"밥 굶으면서 못 먹고 사는 날도 많았지. 이 일을 하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시켰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마음 한켠에 안고 있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미안하지 왜 안 미안하겠어. 그래도 내가 애기엄마 때문에 살고 있잖아."

그러면서 급하게 말을 맺는 하씨. 앞서 자신의 고향을 경상남도 남해군이라고 소개했던 것이 떠오르며, 소위 말하는 무뚝뚝하지만 정 많은 '경상도 남자'가 겹쳐졌다.

앞으로의 계획은 거창하지 않다. 지금처럼 꾸준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 "아이들 공부도 다 마쳤겠다, 그냥 죽기전까지 열심히 운동도 하고 구두도 고치는 거지. 별 거 있겠어요?"

제주 최고의 구두방 남해구두는 한동안은 쭉 자리를 지킬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구두 고칠일 있거나 새로 살 일 있으면 꼭 찾아와. 얼마고 깎아줄께. 친구들도 불러오고." 단골을 남기는 작업까지 잊지 않았다. <헤드라인제주>

박성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