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도 사생활 보장받을 권리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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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도 사생활 보장받을 권리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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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인권 이야기] <6>양동주/제주장애인인권포럼 웹와치사업단

양동주/제주장애인인권포럼 웹와치사업단. <헤드라인제주>
내 방 어딘가에는 제구실도 못해본 채 점형이 뭉개지고 습기로 축축해져버린 점자 용지 몇 장이 먼지 속에 방치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래 전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버려졌을 수도 있다. 그 용지에는 3년 전쯤 언젠가에 시각장애인도 인터넷뱅킹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으로 어린 조카가 불러주는 보안카드 번호를 내가 직접 점자로 기록한 내용이 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은행거래를 위해서는 항상 가족이나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었다. 내 입으로 누군가에게 통장 비밀번호를 말해 주어야 하는 게 싫었고, 내 통장 내역을 가족이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화가 났다. 나에 관한 몇 가지만이라도 온전히 나의 것이고 싶다는 생각에 보안카드 번호를 일일이 점자로 찍는 무모함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가며 은행업무를 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족에 의해서 내 통장과 카드가 관리되어지는 것에 이제는 익숙해졌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내 공인인증서가 형제들의 USB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고, 현금 인출을 위해 필요한 비밀번호를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말하는 것이 거리낌이 없어졌다. 그야말로 철저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할 개인정보를 내 스스로가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 줄줄 흘리고 있는 형국이다. 가족에게 조차 내 사적 영역을 조금도 침범 당하는 것을 싫어했던 내가 이제는 내 사적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인터넷뱅킹에 필요한 보안카드를 점자로 기록할 때의 기대와는 달리 실제로 스피커에서 출력되는 음성에 의지하여 키보드만으로 보안이 강력해진 인터넷뱅킹 시스템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웹접근성이 보장되지 않은 경우에는 시도 자체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몸소 느껴가며 내 개인정보와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소비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비장애인이라면 단 몇 번의 클릭으로 몇 분이면 끝나는 일을 시각장애인은 몇 시간을 투자해도 될까 말까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허무한 기분과 동시에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혼자서는 안되는 일이구나.'
'개인정보니, 사생활이니 신경쓰지 말고 그냥 도움 받는 게 정신 건강에는 좋겠다.'

사실이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아 쉽게 이용되고 있는 인터넷뱅킹조차 접근이 어려워 이용하지 못하는 마당에 개인정보니, 사생활이니라는 것은 시각장애인에게 현실감 없는 단어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이동이 불편하거나 의사소통이 힘들어 가족이나 활동보조인의 도움이 필요한 중증 장애인의 경우에도 너무나 쉽게 개인정보가 노출된다. 그리고 사생활도 없고 비밀도 없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사생활 침해 문제가 이슈화되고 있음에도 정작 개인정보 관리에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에 대해서는 그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 당사자가 자신의 정보를 스스로 노출시키지 않으면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게 현재의 시스템이다. 각종 영수증과 카드 결제 내역 확인, 금융거래를 위한 은행 업무에서부터 행정 및 법률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중증 장애인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개인정보와 사생활이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작년 6.2 지방선거 때의 일이다. 나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부재자투표를 신청하였고, 투표 용지가 든 우편 봉투를 받았다. 우편 봉투를 열고 투표 용지를 확인한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표 용지가 점자가 아닌 일반 묵자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후보자 선거 공약집은 점자로 제공받았던 터라 막상 내 손 위에 내가 확인할 수 없는 투표 용지가 쥐어져 있으니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선거 제도의 기본인 비밀 투표 원칙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이 가족의 도움을 받아 대독과 대필로 내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지지한 후보와 대필자가 지지하고 싶은 후보자가 다르다면?'
나는 내가 선택한 후보에게 제대로 투표가 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말 그대로 내게 주어진 참정권이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닌 대필자의 양심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비밀이 보장된 선거에서 조차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비밀을 보장받지 못하고, 자칫하면 내가 누려야할 1표의 권리가 내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장애인의 개인정보와 사생활이 비일비재하게 타인에게 노출되고, 심지어 법으로 보장된 기본적 권리조차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종 시스템을 구축할 때 장애인을 독립적인 주체가 아닌 관리와 보호가 필요한 대상이라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져 있기 때문이다.

독립된 장애 당사자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를 동반하고 있는 장애인, 보호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은행 업무를 보고, 투표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개인정보 노출이나 사생활 침해, 그리고 이로 인한 장애 당사자의 심리적 모멸감과 수치심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장애인의 개인정보는 물론이고 사생활까지도 관리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도 인간이다. 장애인도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고 비밀을 간직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신체적인 제약으로 인해 정신적인 만족감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장애인은 진짜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헤드라인제주>

<양동주/제주장애인인권포럼 웹와치사업단>

장애인인권 이야기는...

   
장애인인권포럼 심벌마크.<헤드라인제주>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단순한 보호 대상으로만 바라보며 장애인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은 치료받아야 할 환자도,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도, 그렇다고 우대받아야할 벼슬도 아니다.

장애인은 장애 그 자체보다도 사회적 편견의 희생자이며, 따라서 장애의 문제는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사)제주장애인인권포럼의 <장애인인권 이야기>에서는 앞으로 장애인당사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다양하게 풀어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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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 2011-03-01 09:04:48 | 1.***.***.76
장애인 인권 다시한번 생각해봅니다
연재되는 글 읽을때마다 아차하는 생각이
무심코 행했던 말이 엄청난 잘못이었단걸 느끼게 합니다
이 연재로 장애인 인권에 관한 가이드라인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