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도장세공' 장인..."이 일이 천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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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도장세공' 장인..."이 일이 천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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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1> 수제도장 전문 훈민당 대표 박효민 씨
지체장애 지원금 '노 땡큐!'..."내 힘으로 사는게 진짜 삶이죠"

'나'를 증명하기 위한 필수적인 매개체였던 '도장'. 우체국이든 은행이든 업무를 보러 갔는데 이 도장을 챙겨오지 못해 혼쭐이 났던 경험은 한 두번씩 갖고 있을 법 하다.

훈민당 대표 박효민 씨. <헤드라인제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간소화.간편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이제 웬만한 곳에 가도 사인이면 충분하단다.

서서히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가면서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한 도장집도 어지간해서는 찾아보기 어려워 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도장집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기계로 단숨에 찍어낸다.

그래서 그의 장인정신은 더욱 빛나 보였다. 휠체어에 앉아 35년 경력 도장세공의 진수를 보여준 박효민 씨(51).

컴퓨터로 찍어낸 도장이 편하기는 하겠건만 "기술이 있는데 뭣 하러?"라고 한사코 거부하며 다시 손때 묻은 조각칼을 쥔다.

이곳 '훈민당'에서는 이름 석 자만 건네주면 감히 컴퓨터가 따라 할 수 없는 '진짜 기술'이 묻어난 작품이 탄생한다.

# "아무래도 이 일이 '천직'인것 같아"

"우리 어렸을 적에는 종종 그런 일들이 있었죠." 지체 1급의 장애를 안고 있는 그의 이야기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이야 예방 주사같은 것들이 워낙 잘 돼 있어서 소아마비를 앓는 일이 없는데, 옛날에는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니 열이 나면 그저 해열주사를 맞는게 능사였지."

2살 무렵 열이 심하게 올라가자 동네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이로 인해 신경이 마비됐다. 결국, 발걸음을 떼면서부터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조금도 어두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다리가 불편해도 평생 부모를 원망하거나 이를 비관적으로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도장세공을 배우기 시작한 학창시절, 당시에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교에서는 장애인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러니 고등학교 진학 때부터 고민을 많이 했죠."

인문계 고등학교는 대학에 가기 위한 학생들만 찾아가고, 그 외에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선택의 여지는 더 좁았다.

"공업고등학교나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해 공부를 하더라도 결국 다리가 불편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 그럴 바에는 따로 기술을 배우자 생각하고 고등학교에 다니며 도장세공일을 배웠어요."

그렇게 배우기 시작한 도장세공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30년째 이어가는 중이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은 밖에서 공을 차고 노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지. 그래서 혼자 즐길 거리를 찾다보니 지우개를 조각해 친구들에게 나눠주고는 했어요." 어렸을 적부터 손재주가 탁월했던 터라 지우개 조각도 곧 잘해 친구들의 인기를 한몸에 얻었다고 말한다.

또 학창시절 앉아서 즐길 수 있는 클럽활동을 찾다가 붓글씨를 배웠다는 그는 "원래 도장을 배울 때 붓글씨를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데 나는 미리 배워놓으니 어려울게 없었죠."라고 회고했다.

도장일이 '천직'이라고 호언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도장세공을 하고 있는 박효민씨. <헤드라인제주>
# "컴퓨터로 도장 찍어내면 악용될 수 있는데..."

더러 이름을 잘못 파거나 도장의 주인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일들보다는 보람찼던 기억이 더 크게 각인된 그였다.

"한번은 도장을 파고 갔던 손님이 도장을 파고난 이후로 사업이 잘 풀렸다며 감사하다고 찾아왔어요. 참 뿌듯하더라고." 그날 그 손님은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의 도장까지 한꺼번에 파갔다.

"그런일이 있고 나면 일에 대한 자부심도 생기고 참 뿌듯하죠. 그런데 요즘은 도장파는 일이 영 예전같지 않아요"

서두에 설명한 것과 같이 요즘 도장을 찾는 경우가 흔치 않다. 특히 컴퓨터로 찍어내는 도장이 상대적으로 싼값에 팔려나가니 수제 도장은 알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찾는이가 드물다.

그는 줄어드는 일거리도 일거리지만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우려했다. "컴퓨터로 도장을 찍어내면 범죄 등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는데, 요즘에는 '인감증명법'까지 폐지하겠다고 하니..."

도장세공을 하고 있는 박효민씨. <헤드라인제주>
# "장애인 일자리,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죠"

"매번 장애인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그만큼 중요한 것은 지금 하고있는 일자리를 지켜주는게 아닐까요?" 장애인들을 대변한 따끔한 충고도 이어졌다.

"도장파는 일이나 시계수리나 장애인들이 손재주만 갖고도 할 수 있는 일자리가 더 생겨야 하는데 오히려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최근 들어 손님이 부쩍 줄어든 터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에 대한 지원책은 전무하다고 설명한다.

"주위에서는 1급 지체 장애인이라 정부 보조금을 많이 받고 있는 줄 아는데, 내 가게가 있고 사업자 등록을 하면 장애인에 대한 혜택같은 것은 전혀 주어지지 않아요." 젊었을때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으로 가게를 차린 것이 지원혜택을 막았다.

그렇다고 이를 후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절대 지원금만 받고 살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뼈 빠지게 고생해서 50만원을 벌어도 내 힘으로 사는게 진짜 삶인거지."

다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도장 파는일은 계속 하겠지만 그 외의 부수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거리가 있다면 좋겠는데, 일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자리가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지." 자신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덧붙인다.

또 그는 이웃 나라의 사례를 들며 "일본은 장애인들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직업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안마사 같은 경우 시각장애인들만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 뒀지만, 그 외의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조차 먼 나라 이야기다.

# "너무 착한 자녀들...고맙고 또 고마워"

가족 이야기로 슬쩍 운을 뗐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랑거리가 쏟아졌다.

그의 부인 고윤옥씨(52)는 남편과 같은 지체장애 1급이다. 그러나 부부는 29년간 이를 비관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한다.

아내 윤옥씨가 쓴 수필은 지난 10월 보건복지부가 선정한 '아름다운 부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함께 있던 윤옥씨. "잘 쓴 글도 아니고, 그냥 솔직한 이야기를 쓴 건데 선정이 되더라고요. 아름다운 부부상 받았는데 싸우면 신문에 기사 나겠지?" 마주 보며 웃는다.

이같은 삶은 부부의 긍정적인 마인드는 물론이거니와 잔망스러운(?) 자녀들도 큰 몫을 했다.

"보통 어릴때는 부모님의 행색이 초라하기만 해도 부끄러워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애들은 자기 부모를 창피해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더라고요"

슬하의 1남 1녀는 운동회나 학부모 참관일이 다가오면 꼭 학교에 와야한다고 난리를 쳤단다. "정말 착하고 속 깊은 아이들이에요. 그저 고맙고 또 고맙죠."

어렸을 적부터 부모를 돕던 것에 익숙한 두 자녀는 커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며 모두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현직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큰아들은 내년 봄에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장가간다고 신붓감을 데려온 걸 보니 어찌나 뿌듯하던지..."예비 며느리도 사회복지사라니 금상첨화란다.

아내 고윤옥씨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박효민씨. <헤드라인제주>
# 행복한 삶의 비결?..."그저 감사할 따름"

다시 돌아와서, 도장일을 하던 사람들이 업종을 바꾸는 경우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사정이 어렵다보니 업종을 바꾸지 않더라도 시계수리나 열쇠작업 등을 겸업하는게 현 흐름.

그래도 그는 꿋꿋이 버텼다.

"아무리 어렵다 한들 이것이 내 일이니 당연히 끝까지 가야지"라며 옆에 놓인 조각칼을 바라본다.

"그래도 옛날에 비해 정말 살기 좋아졌어요. 예전에는 장애를 지니고 있으면 꼭 죄지은 사람처럼 취급했는데, 지금은 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나라라는게 어디에요?"

비극적으로 살아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비결을 살짝 엿본 듯 했는데, 곧 그는 명쾌한 답을 내려줬다.

"직업을 갖게된 것도, 착한 자녀를 얻은 것도, 큰 걱정거리 없이 사는 것도 모두 감사하죠." 그가 생각한 정답은 '감사하는 삶'이었다.

비결을 전해듣고 덩달아 행복감에 젖어 나서는 길. 출입구에 새겨진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직접 파는 도장' 문구가 큼지막하게 보인다.

꼭 다시 한번 찾게될 듯한 훈민당이 남겨준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에 대한 '감사'였다.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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